기록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분명 바쁘게 움직였는데, 저녁이 되면 무엇을 했는지 흐릿했다.
마치 하루 전체가 뿌연 안갯속을 지나온 것 같았다.
강사로 15년을 보내는 동안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수업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하루가 저절로 정리됐으니까.
몇 시엔 무슨 수업, 몇 시엔 상담.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하루의 뼈대가 이미 짜여 있었다.
문제는 그 틀을 벗어난 뒤였다.
블로그 대행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하루는 더 이상 누가 짜준 시간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늘 무슨 원고를 쓰고,
어떤 클라이언트를 신경 써야 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하고 채워 넣어야 했다.
그런데 그 판단을 도와줄 기준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날 한 일을 세 줄 정도로 적는, 정말 작은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습관이 생각보다 큰 균열을 만들어냈다.
기록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먼저 달라진 건,
하루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던 시간들이,
저녁에 기록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뭐라도 적을 게 있어야 하니까,
무의식 중에 하루를 더 의식하며 살게 됐다.
두 번째로 달라진 건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기록이 쌓이자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독 힘들었던 날들의 공통점,
유독 잘 풀렸던 날들의 공통점.
그전에는 그냥 "오늘은 이상하게 힘들었다"로 끝났을 감정이,
기록 덕분에 원인을 찾아갈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세 번째는 조금 더 실용적인 변화였다.
마케팅을 배우고, 운동을 하고,
경제를 공부하는 지금의 나에게 기록은
배움을 붙잡아두는 도구가 되었다.
배운 것을 그날그날 적어두지 않으면,
며칠 지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기록은 그렇게 새어나가던 배움을 붙잡아주는 그물망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기록 이후의 나는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의 나는 하루가 지나가는 걸
그저 지켜보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하루를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흘러가는 삶과 쌓이는 삶은,
결국 전혀 다른 모양의 삶이 된다.
거창한 계획도, 완벽한 형식도 필요 없었다.
그저 매일 몇 줄이라도 적어보는 것.
그 사소한 시작이 하루를, 그리고 결국엔
삶 전체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겨놓았다.
지금도 나는 매일 밤 노트를 편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흘려보내지 않고 남겨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