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살아오면서 다시 한번 시선의 위치가 바뀌는 시간이었다.
EAIC 포럼을 만들어 주신 한정엽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이 담긴 감사의 인사입니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이상한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위치가 조금씩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 이상한 곳으로 갔다고 말하는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Peter Coppin 교수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표상을 이야기했다. 고대의 유물에서부터 오늘날의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세계를 끊임없이 다른 방식으로 표상해왔다. 이미지에서 문자로, 문자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그리고 VR과 같은 몰입형 환경으로 이동하면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함께 변해왔다.
특히 강연 중 한 장면이 오래 남았다.
강연자는 화면에 인터넷에 검색된 산의 이미지를 여러개 띄웠다. 화면 속에는 서로 다른 높이와 다른 모습의 산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먼저 그 이미지를 가리키며 “이것은 산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사진은 산의 구체적인 형태와 높이, 거리와 공간적 관계를 한눈에 전달하고 있었다.
그다음 그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화면 속 산은 곧 소리의 구조로 변환되었다. 높은 산은 높은 음으로, 낮은 산은 낮은 음으로 대응되면서 산의 윤곽이 하나의 청각적 패턴으로 바뀌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래서? 뭐지? 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소리로 바꾸는 것. 일종의 기술적인 번역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초 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다시 산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지금 산을 보고 있지 않은데, 왜 산의 형태를 상상하고 있지?’
이어 촉각의 예가 나왔다. 산의 형태를 그대로 만질 수 있는 3차원 모델이었다. 손으로 표면을 따라가면 능선과 골짜기의 높낮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의 움직임을 통해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강연자는 이것을 다시 수어와 몸짓의 문제로 확장했다. 산의 형태를 닮은 제스처와, 산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가리키는 상징적 제스처를 구분했다.
어떤 표상은 대상을 닮아 있다.
어떤 표상은 대상을 닮지 않았지만 그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어떤 표상은 그 둘 사이에서 움직인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표상이 어떤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가에 따라 우리가 대상과 맺는 관계 자체가 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오소백 박사님의 에밀레종과 이머시브 사운드와 시각장애인의 경험이 오버랩 되면서 아주 묘한 몰입이 되었다. Peter Coppin 교수의 강연 앞에 오소백 박사님의 강연을 넣은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어쨌던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무심코 핸드폰에 생각나는 단어들을 빠르게 적었다.
이미지. 소리. 촉각. 공간. 몸. 상징. 관계.
그리고, “그렇다면 회화는?” 이라고 적었다.
이후 부터, 강연을 듣는 방식이 달라졌다.
나는 그가 보여주는 각각의 시연을 내 작업과 계속 겹쳐보고 있었다.
내가 VR에서 선을 하나 그을 때, 그것은 단순한 선인가?
평면 위의 선과 공간 속에서 몸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진 선은 같은 선인가?
내가 VR 공간에 어떤 형상을 배치했을 때, 관객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과 그 형상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은 같은 방식의 인식인가?
그리고 만약 그 공간에 소리를 넣는다면, 혹은 촉각적 정보를 더한다면, 나는 기존의 이미지를 확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표상 체계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강연을 제대로 듣고 있는건지 잡생각만 하는건지 구분할 수 없지만,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VR을 새로운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VR의 중요한 가능성은 ‘3차원으로 그릴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VR은 표상의 조건 자체를 바꾸는 장치일 수 있다.
회화에서는 내가 만든 이미지가 관객 앞에 놓인다.
관객은 그 이미지를 바라본다.
하지만 VR에서는 관객이 이미지가 존재하는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몸을 움직이고, 방향을 바꾸고, 거리를 조절하고, 어떤 대상에 접근하거나 멀어진다.
이미지를 보는 것과 공간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지각의 구조적 차이일지도 모른다.
특히 오소백 박사님의 연구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이머시브 사운드가 전달 인터페이스?로 사용 될 때, 누구나 생각 할 수 있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한정엽 교수님 께서 부연한 말씀 또한, 같은 바램이다. 국제학술지에서도 큰 이슈가 될것이다. 촉각과 청각으로 정보와 교감할 수 있다는 증명은 너무나 멋진 상상에서 유의미한 결과와 시각에 편향된 인간의 정보 취득에 망치를 들었다고 생각된다.
기존의 접근성은 흔히 이미 존재하는 시각적 정보를 텍스트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사진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사진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연은 달랐다.
이미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정보를 다른 감각의 구조로 다시 만드는 것.
그 차이가 크게 다가왔다.
그제야 나는 접근성이라는 문제가 단순히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질문은,
“정보란 반드시 하나의 감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예술의 문제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몇천년 동안 시각이라는 감각에 너무 의존해서, 시각이 없는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르는것 까지도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정확히 말해, 정보는 한가지 감각으로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에 닿았을때, 실내가 조금 춥기도 했지만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회화라고 부르는 것은 오랫동안 시각적 표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애초에 그렇게 단일? 단순 하지 않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고, 움직이고, 기억하고, 언어화하면서 세계를 이해한다. 그렇다. 예술 역시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감각으로 고정해서 보여주는 대신, 서로 다른 감각과 표상 사이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이 갑자기 하나의 질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회화는 평면 위에서 세계를 표상한다.
VR은 공간을 통해 세계를 표상한다.
소리는 시간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표상한다.
촉각은 표면과 압력과 움직임을 통해 세계를 표상한다.
언어는 추상적인 범주와 관계를 표상한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표상들이 만나는 곳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 있다.
약간은 무서운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새로운 표상은 우리가 무엇을 지각할 수 있는지를 바꾸고,
무엇을 지각할 수 있는지가 바뀌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도 달라지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가 달라지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범위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새로운 표상을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과 가까운 것이 아닐까?
너무 많이 나갔나?
암튼,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이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정확한 이름도 붙이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부터가 인지과학이며, 어디에서 철학이 시작되는지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제는 그 알 수 없음 자체가 중요해졌다.
예전에는 작업을 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것을 더 이상 막연한 직관으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것을 관찰하고, 질문으로 만들고, 개념으로 정리하고, 서로 다른 현상 사이의 관계를 구조화하고, 가능하다면 하나의 형식지로 바꾸어보고 싶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단순한 감상이나 개인적인 직관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어떤 조건에서 반복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작품과 인터페이스로 구현할 수 있는가?
이번 포럼은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주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포럼에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일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발견한 것에 가까웠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것.
그러나 분명히 감각되고 있는 것.
아직 개념이 되지 못한 것.
그러나 어쩌면 새로운 개념이 될 수 있는 것.
나는 지금 그곳을 바라보고 찾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을 작품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어쩌면, 지식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 연구자의 길?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을 감각하고,
감각한 것을 표상하고,
표상한 것을 구조화하고,
구조화한 것을 다시 세계 속에서 검증하는 것.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