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오늘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내용이. 요즘 논란도 아닌데 무슨무슨 논란, 또 무슨무슨 논란이라고 언론사들이 "논란"이라는 단어를 무바카라임하게 남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논란"이 아닌 "놀란"을? 똑같나?^^ 암튼.
인생 살면서 좋은 인연이 있다. 살아 가면서 조카가 된 부부의 초대로, 귀한 음식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게 핫한 "오디세이"
그렇게 만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영화에서, 내게 남는 한컷은 저승에서 망령들이 쫓아오는 장면이 가장 잔혹하고 명확한 장면이다.
수많은 망령들이 산 자를 향해 달려드는 그 장면은 단순히 공포스럽다는 말로는 많이 부족하고 어색하다. 그것은 죽음이 더 이상 관념이나 신화? 귀신? 망령? 보다는, 눈앞에서 육체를 가진 존재처럼 밀려오는 순간이다.
더 잔혹한 것은 그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는다는 사실이다. 오디세우스와 살아서 돌아가려는 병사들이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죽은 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이고, 죄의 흔적이며, 언젠가? 바로 지금이라도, 자신도 도달하게 될 미래의 얼굴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잔혹하면서도 명확하게 내게 와닿는다.
(물론, 후기를 작성하면서 더 이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집도 있다.)
그렇게 살아있는 병사들은 삶을 향해 달려가지만, 죽음은 언제나 그 뒤에서 함께 달려온다.
망령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살아있는 병사(인간)들은 배로 달아나 노를 젓는다.
하지만 죽은 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를 본다.
현재가 미래에 쫓기는 장면이다.
우리는 평생 미래로부터 도망친다. 늙음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상실로부터.
하지만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깨닫는다.
우리가 도망치듯 달리고 있는 그곳에서, 시간이 우리를 마주 보며 우리가 뛰는 속도만큼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마주보며. 마주보며. 마주보며......
그리고, 영화에서 처럼,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 기억을 요구한다.
또한 레비나스의 사유처럼 죽은 타인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과 바카라임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영화의 처음으로 가보면,
바다에 비스듬히 잠긴 트로이 목마는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이 장면을 탑으로 생각해도 될듯하기도 하다. 사유는 언제나 자전적이고 고집스럽고, 가져다 붙이는^^. 어쨌든.
그러나 그 아름다움 안에는 죽음이 숨어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진실과 거짓이 뒤집혀 있다. 데리다가 말한 의미의 균열처럼, 목마는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기만을 드러낸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장면이 처음과 끝에 있었다. 내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머리를 계속해서 때리는 것기도 하고, 날 잡으러 온 경찰들이 문을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지팡이가 바닥을 친다.
탕. 탕. 탕.
그 소리는 이야기를 설명하기보다 나의 몸을 먼저 괴롭힌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불편하다. 푸코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인간의 몸에 먼저 새겨지는 소리다.
근데, 영화에서와 같이 진짜 여행은 전쟁이 끝난 뒤 시작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만든 목마처럼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 갇힌 사람이다.
그는 영웅이고 왕이며 남편이고 아버지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이렌은 그 믿음의 틈을 파고든다. 그녀의 노래는 유혹이 아니었다. 노래는 한 소 절도 듣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아주 영리한? 잘 피해 가는? 모습을 봤다. 세이렌의 노래는 우디세우스의 절규와 표정을 토해 볼 수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갈망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아니 갈망할 수 없는 상태를 너무나 정확하게 인식시켜 주는, 흔히 요즘 말로 현타?로 멘붕... 광기로 미쳐버린?
"너는 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떠나기 전의 너 자신을 원하는 것이다."
세이렌은 잃어버린 시간과 지키지 못한 약속을 들려준다. 바르트의 말처럼 과거는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를 다시 읽는 순간, 과거의 의미도 달라진다.
그렇게 지중해 바다는 오디세우스를 벌주는 장소가 아니었다. 들뢰즈의 시선에서 바다는 그를 계속 다른 존재로 만들어가는 생성의 공간이다.
그래서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떠나기 전의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또한 주인공이 "코코와 도코데스카?" -요즘 내가 일본어 배우는 재미에^^- 옆에 있던 아테네가 말해준다. 고향도 모르겠냐고?
이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은? 무얼까?
"나는 누구였는가?" 이런 강도의 질문은 조금 가볍다.
"나는 누구였다고 믿고 있었는가?"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먼 곳까지 갔다가 돌아온 나는, "떠나기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아마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일거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절대로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돌아갈 수 없는 나를 인정하면서 지금의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전쟁을 위한 긴 여행은 돌아온다. 그러나 인생은 돌아오지 못한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온 곳은 어쩌면 이타카가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과 자신이 되어버린 모든 것을 받아들인, 새로운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진짜 귀환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올린 글이 계속 생각난다.
여행은 돌아올 수 있지만, 세월(인생)은 돌아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