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휴일이다.
경복궁 옆. 세종마을에 들어서자 가을 햇살이 길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을 추측하는 표지석 앞에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꽃잎 사이로 바람이 지났다.
10년전부터 단글인 백암순대국집에 들러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국밥에 소주 한 병을 곁들였다. 뚝배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고, 알싸한 소주가 입안에 번졌다. 이것이 행복이지.
첫 소설의 배경이었던 오후카페는 폐업했다. 문을 열었을 때 울리던 작은 종소리도, 커피 향이 밴 공기도 사라지고 없었다. 익숙한 테이블과 어머니의 손처럼 오래도록 등을 받쳐 주던 의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앞에 한참 서서 사진을 찍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테이블 나무 표면은 아직도 차갑고 매끄러웠다.
조금더 걸어 바로 위 사거리 카페에 앉아 하이네켄 생맥주를 주문했다. 잔 표면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혔고, 입술을 대자 차가운 거품이 먼저 닿았다. 창이 오픈되어 있어 가을빛이 깊게 들어오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지나갔다. 나는 특별히 할 일 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 구경만큼 좋은 구경도 없다. 풍경은 익숙해지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나타났다가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바쁜 걸음으로 통바지 바지자락으로 바닥을 쓸고 지나간다. 그 짧은 순간, 누군가의 하루가 내 눈앞을 스쳐 간다.
강아지와 걷는 사람, 지도를 보는 여행객,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 다른 하루를 살지만 같은 거리와 햇살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엄마와 장애가 있어보이는 엄마보다 키가 큰 청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들은 조금 앞서가려 했고, 엄마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조용히 보폭을 맞추었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걸음이 느릴 때 재촉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낮추는 일. 말보다 먼저 내미는 손, 설명하지 않아도 놓지 않는 손.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에 체온을 건네며, 괜찮다고 말하는 일.
그때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갔다. 구두 굽이 바닥을 다급하게 두드리고, 코트 자락이 바람처럼 펄럭였다. 깊어지던 생각은 멈추고 나는 피식 웃었다. 삶의 무게를 생각하다가도 누군가의 우스꽝스러운 걸음 하나에 마음을 빼앗긴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잠시 바라보고, 마음을 내어주고,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 된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쌉쌀한 맛이 생각의 매듭을 조금씩 풀어 준다.
오늘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꽤 많은 곳을 다녀온 기분이다.
세종마을에서 오래된 국밥집과 사라진 카페를 지나, 이름 모를 사람들의 하루 속에 잠시 머물렀다. 뜨거운 국물의 김과 소주의 알싸한 향, 가을 햇살의 온기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한데 섞여 오후를 이루었다.
하이네켄 한 잔이면 충분한 오후다.
그런데 잔을 비우고 나니 사람들의 온기와 오래된 장소의 시간이 마음에 남아 있다. 빈 잔 바닥에 남은 거품처럼,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 오래도록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래서 한잔 더 주문한다.
한 잔만 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