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필요하지 않을 때 잊지 않는 것

by원성진 화가

2026년 8월 21일 금요일 오후 6시 홍제동.

종일 오락가락한 비가 지금도 그렇다.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맥주 한 잔 해야 하는 날이다. 냉장고에도 맥주는 있지만, 오늘은 집을 나서야 한다. 술이 마시고 싶은 것인지, 집을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암튼 자축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섰다.

젖은 골목을 지나 홍제천 산바카라길로 내려섰다.

홍제천 둑가에 있는 맥줏집 앞에 도착했다.

문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금일 개인사정으로 임시 휴업.’

하필이면 오늘이다.

비도 오고, 금요일이고.

말이 되나?

하지만 나는 마음을 빨리 접는 편이다. 닫힌 문 앞에 오래 서 있다고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니까.

조금 더 걸어 양밍산에 들어갔다. 마파두부에 오이무침에 짜장면까지 시켜서^^ 생맥주를 마셨다. 세 잔인지 네 잔인지 모르겠다. 매콤하고 얼얼한 마파두부 뒤로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생각보다 좋았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르지.
원했던 곳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날 저녁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잖아. 그렇게 기대했던 한 잔이 사라진 자리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잔이 들어오기도 한다.


취하고 싶어 갔는데, 배만 부른 채로 다시 길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그쳤다 하는데, 지금은 잠깐 멈춘 상태다. 습하긴 습하다.

나는 우산을 짚으며 걸었다.

그러다 문득 우산을 생각했다.

비가 쏟아질 때 우리는 우산을 꽉 붙잡는다.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살이 휘어져도 놓지 않는다.

사실 그게 우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비 안 맞으려고 우산을 붙잡는 것이다.

그런데 비가 그치면, 조금 전까지 그렇게 소중했던? 필요했던 우산이 갑자기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된다.


간혹, 식당에 들어갈 때 문 옆에 세워두고, 밥을 먹고 나오면서 깜빡 잊는다.

몇 걸음 걷다가 생각나면 돌아간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는 날도 있다.

집에 도착하고, 신발을 벗고, TV를 보고, 잠을 자고, 다음 날을 맞는다.

우산은 잊힌다.

며칠 뒤 다시 비가 내리면 그제야 생각난다.

‘아, 그날 식당에 두고 왔구나.’

그런데도 찾으러 가지 않는다.

우산이 이것저것 있어서 잊어버린 우산이 없어진 지도 모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산을 새로 사지는 않는다. 살다 보면 현관에 우산의 개수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관심도 없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우산은 비가 쏟아질 때도, 바람이 불 때도, 우산살이 휘어질 때도 나를 지켜주었다.

우산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비가 그쳤을 뿐인데.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힘들 때는 가장 먼저 찾던 사람, 외로운 밤이면 전화를 걸던 사람, 내가 무너졌을 때 말없이 곁에 있어주던 사람.

그런데 삶의 비가 그치면 그 사람을 잊는다.

필요할 때는 특별했던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 평범해진다.

때로는 없어도 되는 사람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그렇게 두고 왔을까?

어느 식당의 의자 옆에 놓인 우산처럼, 어느 계절의 뒤편에, 어느 오래된 기억 속에.

그리고 비가 다시 올 때에야 생각난다.

‘그 사람이 있었지.’

하지만 생각났다고 해서 다시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위로를 찾는다.


낡은 우산을 버리듯 오래된 인연을 버린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참 이상하다.

필요할 때 소중한 것은 어쩌면 소중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 소중한 것은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날, 아무 이유도 없이 문득 안부가 궁금한 사람.

나는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고, 인연의 깊이라고 생각한다.


우산은 비가 그친 뒤에도 여전히 우산이다.

다만 지금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사람도 그렇다.

지금 내 곁에 없다고 해서, 지금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한때 나를 지켜준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필요할 때 잘하는 것’보다는, ‘필요하지 않을 때 잊지 않는 것’ 인지도 모른다.


걷다 보니 홍제천 위로 내부순환 고가도로 아래로는 더 이상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젖은 풀에서는 짙은 풀냄새가 났고, 홍제천에 비친 도시 불빛들은 물결 따라 흔들렸다.

나는 짚고 가던 우산의 가운데 부분을 잡고 들었다.

들고 가고 싶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곁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우리는 평생 비를 맞으며 살아간다.

어떤 날에는 누군가가 나의 우산이 되어주고, 또 어떤 날에는 내가 누군가의 우산이 된다.

그러다 비가 그치면 서로를 잊는다.

하지만 정말 귀한 인연은 비 오는 날에만 생각나는 사람이 아니다.

맑은 날에도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다.

오늘 밤 나는 우산을 놓지 않고 집으로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우산은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내가 잊어버리는 것이 우산이었나? 어쩌면, 그 우산과 함께 비를 맞지 않고 걸었던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비가 멈췄어도, 그 우산을 오래 들고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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