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인간을 만들었다.

스스로 철학자임을 말하고 싶은 작가

by원성진 화가

언어가 생기자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은 이야기가 되었고,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으며, 신화는 종교가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짧은 생명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이 죽어도 그의 이야기는 남았다.

그의 이름이 남고, 그의 노래가 남고, 그가 그린 그림이 남았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기억을 통해 죽음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동굴 벽에 남겨진 오래된 손바닥 자국을 생각해 본다.

수만 년 전 누군가가 동굴 벽에 자신의 손을 대고 안료를 뿌렸다.

그 손자국을 바라보면 이상한 감정이 든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의 손을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의 흔적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손자국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

예술의 가장 오래된 문장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

나는 보았다.

나는 느꼈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사라진 뒤에도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예술일지도 모른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묻는 존재로 바라본다.

우리는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죽음을 미리 상상한다.

그래서 오늘을 붙잡는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자각과 외로움에 대한 자각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언젠가 혼자 죽는다.

누구도 나와 함께 죽을 수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결국 혼자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를 찾는다.

사랑하고, 친구를 만들고,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만들고, 이야기를 남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것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화란 어쩌면 죽음을 알고 있는 존재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 낸 거대한 저항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문화."

이 부분에서 최진석 교수님의 의견을 묻고 싶기도 하다.


문명을 다시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도시는 단순히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 만든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모여 있다.

수천 개의 창문에서 불이 켜진다.

그 창문 하나하나에는 한 사람, 한 가족의 삶이 있다.

누군가는 저녁을 먹고, 누군가는 바카라을 읽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슬픔을 안고 창밖을 바라본다.

도시는 수백만 명이 함께 사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수백만 개의 고독이 나란히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도시는 문명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외로움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었지만, 더 이상 서로의 마음을 자동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수천 명의 친구를 가질 수 있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외롭다.

인터넷은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1초 만에 연결해 주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에는 닿지 못할 때가 있다.

기술은 거리를 없앴지만, 외로움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외로움은 거리의 문제보다,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직립보행?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높은 지능?

언어?

나는 그 모든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외로움을 의식하는 존재가 아닐까?

물론, 다른 생명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직 다른 생명의 내면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은 자신의 외로움을 의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며, 그것을 예술과 철학과 종교와 사랑으로 변환한다.

인간은 외로움을 느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외로움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른 인간에게 건넨다.

이것이 인간 문화의 놀라운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문명을 조금 다르게 정의해 보고 싶다.

문명은 뭘 만들어낸 것보다, 인간이 서로의 고독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 흔적이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하려는 인간의 시도였고,

철학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려는 시도였으며,

문학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시도였다.

음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소리로 옮기는 일이었고,

회화는 말보다 먼저 존재했던 침묵의 언어였다.

사랑은 타인의 존재를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으며, (... 아직도 확언할 수는 없어서...)

우정은 서로의 외로움을 잠시 함께 견디는 일이었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 온 모든 문화는 하나의 오래된 욕망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낄 수 있습니까?"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빠른 자동차와 더 높은 건물, 더 정교한 기계와 더 강력한 인공지능을 만들어 왔지만, 인간이 수만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이 외로움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찾고,

여전히 친구를 찾고,

여전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며,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을 기다린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글을 쓴다. 오늘처럼. 외로움 속에서 글을 쓴다. 누가 읽어줄지 모르는.......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노래를 만든다.

사진을 찍는다.

시를 쓴다.


어쩌면 예술가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본능을 이어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고독을 밖으로 꺼내 세상에 건네는 사람.

그리고 그 작품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말없이 대답한다.

"나도 그랬어."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서로를 만난다.

한 사람의 외로움이 다른 사람의 외로움과 만나는 순간,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 예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이는 순간, 문화가 된다.


말이 너무 와버렸다. 아니 생각이 너무 많이 와버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문명을 시작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외로움이었을까?

아마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은 인간을 서로에게 가까이 오게 만들었고, 외로움은 그 곁에 머물게 만들었다.

두려움이 공동체를 만들었다면,

외로움은 그 공동체에 이야기를 불어넣었다.

두려움이 불을 지키게 했다면,

외로움은 그 불 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언어가 되고,

언어가 기억이 되고,

기억이 신화가 되고,

신화가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고, 자연 속에 자신만의 의미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결국 문명이란 어쩌면 인간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만든 가장 거대한 집인지도 모른다.

그 집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여기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나도 여기 있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이 두 문장 사이에 놓여 있는 아주 긴 시간인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우리를 함께 살게 했다.

그러나 외로움은 우리를 서로 이해하게 했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그 끝없는 노력 위에서 언어가 태어났고, 예술이 태어났으며, 철학이 태어났고, 사랑이 태어났고, 마침내 문명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보? 발전? 나아감? 이런 거보다는 서로 위 마음을 들여다보는 탐하는 통하는 그런 시간의 축적.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만들자면,

인간의 역사는 서로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만 년 동안 이어져 온 가장 긴 대화의 역사였다고.

그리고 아직 그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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