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진다.
"뭐 해?"
(뭐지? 왜 갑자기? 무슨 일이 있나? 심심한가? 설마? 보고 싶은 건가?)
신기한 일이다.
질문은 하나인데, 답보다 먼저 질문의 의미를 해석한다.
만약 언어가 사전에 적힌 뜻만으로 움직인다고 한다면, "뭐 해?"는 단순히 현재의 행동을 묻는 문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언어는 사전에서 태어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롤랑 바르트는 인간은 기호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그가 그렇게 말한 뜻은, 말이 하나의 기호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호는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슬롯와 문화, 기억과 경험들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뭐 해?"라는 말도 그렇다.
친구에게는 '놀자.'
연인에게는 '보고 싶어.'
부모에게는 '잘 지내세요?'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사람에게는 '문득 네가 생각났다.'
헤어진 연인에게는 '아직 늦지 않았을까?'
같은 문장인데도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왜일까?
결국 "뭐 해?"라는 두 글자는 하나의 기호일 뿐인데.
그 기호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고, 함께 보낸 시간이며, 서로를 향한 감정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바로 의미다.
그는 이것을 언어게임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규칙 속에서 살아간다.
연인의 언어게임.
친구의 언어게임.
부모와 자식의 언어게임.
온라인 게임의 언어게임.
같은 "뭐 해?"라도 게임이 달라지면 규칙도 달라지고 의미도 달라진다.
회사 상사가 보내는 "뭐 해?"는 긴장감을 만들지만,
오랜 친구의 "뭐 해?"는 웃음을 만든다.
아이의 "아빠 뭐 해?"는 놀이가 되고,
홀로 계신 어머니의 "뭐 하니?"는 그리움이 된다.
단어는 변하지 않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는 언어가 마음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관계가 언어를 만든다.
서로 사랑했던 시간.
함께 웃었던 기억.
다투고 화해했던 날들.
침묵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했던 경험.
그 모든 시간이 "뭐 해?"라는 두 글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인간은 말을 듣고 있지만, 그 속에 있는 관계를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짧다.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보고 싶다."
그리고
"뭐 해?"
짧지만 그 안에는 긴 세월이 담겨 있다. 외국어도 마찬가지.
긴 문장은 많은 정보와 설명을 전달하지만,
짧은 문장은 그냥 대놓고 관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래서 "뭐 해?"는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확인이다.
'나는 아직도 네 삶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인가!'
'지금 네 시간 속에 내가 잠시 들어가도 괜찮은가!'
우리는, 그니까 인간은 존재를 혼자 증명할 수 없다.
누군가 나를 불러 줄 때,
누군가 내 안부를 물을 때,
누군가 이유 없이 "뭐 해?"라고 말을 건넬 때,
우리는 그제야,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누군가의 세계 안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수천 년에 걸쳐 발전을 이뤄왔지만,
또한 그 언어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전화를 열어 두 글자를 보낸다.
"뭐 해?"
그러나 그 짧은 두 글자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낳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처럼 삶의 자리마다 전혀 다른 규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종국에는 한 사람의 존재를 다른 사람의 세계 안으로 조용히 초대하는 가장 인간적인 문장으로 해석된다.
어쩌면 인간의 언어는 애초부터 사물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적 억지이겠지만.
그렇다면 언어는 외로운 존재들이 서로의 삶에 작은 불을 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