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수 있는 것, 돌아올 수 없는 것

여행과 인생

by원성진 화가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저녁이 오는 시간.

북창동 골목은 젖은 아스팔트 위로 조금 일찍 켜진 간판 불빛을 길게 풀어놓고 있다. 우산을 들거나 안 들거나 사람들이 천천히 오가고, 간혹 캐리어 바퀴는 빗물을 가르며 지나간다. 식당마다 술집마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동료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중국에서 온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들, 일본인 남녀, 서양에서 온 배낭여행객, 동남아시아에서 온 젊은이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부모도 있었고, 혼자서 골목을 천천히 걷는 여행자도 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오늘만큼은 같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북창동은 수없이 다른 문장으로 읽히는 공간이 아닐까?

여행자는 이 공간을 낭만이라는 언어로 읽고,

현지인은 생계라는 언어로 읽는다.

그렇다. 같은 골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각자가 해석한 북창동뿐이다.


여행객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있다.

화려한 맥주집 간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참치집을 흘깃거리고, 오래된 골목을 사진에 담고, 청진동해장국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에 갸우뚱거리고.

아마도 이들 중에 내일 돌아가야 하는 여행객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루만 더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들에게 북창동은 떠나기 아쉬운 여행지일 것이다.

없는 게 없는 남대문 시장과, 명동과 시청과 광화문과 경복궁이 몰려있는 이곳.


여행객은 자유롭게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여행 동선은 이미 지도와 SNS, 맛집 리스트와 별점으로 정해 놓았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삶을 살아내는 현지인도 출근 시간과 임대료, 노동과 생계로 하루의 일과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말하듯,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대부분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거리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배달 가방을 싣고 빗길을 달리는 라이더.

식당으로 맥주 상자와 식재료를 나르는 사람.

빗속에서 거리 청소하는 노동자.

보이진 않지만, 식당 안에서 주방의 불을 올리는 요리사.

손님을 기다리며 테이블을 닦는 식당 주인.

그들은 이 거리를 여행하지 않는다.

이 거리를 살아낸다.


어쩌면 이 거리에서 노동을 하는 분들 가운데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곳을 떠나 여행을 하고 싶다."

여행객에게는 오래 머물고 싶은 장소가,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 된다.


같은 비가 내리고, 같은 골목을 걷지만, 사람마다 마음속 풍경은 전혀 다르다.

여행자는 공간을 사랑하고, 현지인은 시간을 견뎌낸다는 것을.


우리는 여행자인 동시에 현지인이고, 떠나는 사람이면서 돌아오는 사람이다.

여행은 잠시 머무는 사람이 만드는 추억이고, 인생은 오래 머무는 사람이 감당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다음 여행을 꿈꿀 수 있고, 마음에 남는 도시라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그렇게 여행은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의 하루도, 지금 내리는 이 장맛비도, 지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만날 수 없다.


인생은 편도이고, 여행은 왕복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낯선 도시를 걸으며 비로소 자신이 살아온 일상을 바라보게 되고, 멀리 떠났다가 돌아와서야 집의 온기를 새삼 느낀다.


여행객은 도시에 대한 이미지를 여행한다.

북창동에 오기 전 이미 수없이 본 영상과 사진, 후기와 광고, SNS 속 풍경이 먼저 여행을 만들어 놓는다.

현실보다 이미지가 먼저 존재하는 시대.

우리는 실제 북창동보다, 머릿속 북창동을 확인하기 위해 이 거리를 걷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 냄새만큼은 복제되지 않는다.

젖은 골목의 습기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국물 냄새,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는 어떤 사진도 대신할 수 없다.

몸으로 경험한 세계만이 끝내 우리를 변화시킨다.


여행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바꾼다.

떠나기 전의 나는, 돌아온 뒤의 나와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여행은 존재의 재구성이다.


비는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자의 우산도 적시고, 배달원의 헬멧도 적시고, 식당 주인의 앞치마도 적셨다.

비는 누구도 구별하지 않았다.

좀 더 머물고 싶은 사람과, 떠나고 싶은 사람도, 결국은 모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행자였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있는 곳을 떠나고 싶어 하며 살아가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곳을 그리워하는 것.

그리고 여행이란, 잠시 다른 세상으로 떠나, 결국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소중함을 다시 배우고 돌아오는 일이다.


북창동 GS24 편의점 앞에서 생각해 본다.

여행은 돌아온 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는지.

그리고 인생은 돌아올 수 없기에,

매 순간 스스로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단 한 권의 텍스트 같다.

우리가 '오늘'이라고 부르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흔적이다.

그래서 인생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단 한 번도 같은 오늘을 살아본 적은 없다.


그렇다. 오늘이라는 문장은 내일 다시 고쳐 쓸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은 가장 아름답다.

작가의 이전글우산을 들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