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들고 걸었다.

by원성진 화가

비가 오는 날이면.

일을 하는 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우산도 없이 바쁘게 뛴다. 그게 내 일이니까.

퇴근하고 산바카라을 할 때는 우산을 들고 걸음을 늦춘다.

비는 천천히 걷는 사람에게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가는 빗줄기는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는 손톱 끝의 간지러움과 시원함 같고, 굵은 빗방울은 오래 잠겨 있던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젖은 흙에서는 흙과 풀잎이 뒤섞인 짙은 향이 피어오르고, 가로수는 빗물을 머금은 채, 밤이 깊도록 초록빛 냄새를 천천히 흘린다. 습습한(습하고 습한) 공기가 볼을 스치고, 슬리퍼와 발은 이미 젖었다. 혀끝에는 빗속 공기의 쌉쌀한 맛이 스며든다.


비가 오면 나는 지나는 사람들의 우산을 바라본다.

우산은 얼굴을 가리지만, 사람을 더 많이 드러낸다.

물론, 나도 상황에 따라 이럴 때도 저럴 때도 있지만. 암튼.


누군가는 손잡이를 끝까지 힘주어 움켜쥔다.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비바람 한 번에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지나온 계절들이 아직 손에서 풀리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손끝으로만 가볍게 잡는다. 우산은 손끝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삶을 너무 세게 붙잡지 않는 사람은 저런 모습일까? 기분 좋은 날인가?

그리고, 어깨에 걸치듯 우산을 드는 사람도 있다. 비를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두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편안하다.


머리 바로 위에 바짝 붙이는 사람도 있다. 단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럽다. 비가 싫거나, 젖는 일이 두려운 사람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산을 높이 든 사람은 얼굴과 어깨를 조금 내어준다. 대신 더 먼 풍경을 바라본다. 약간의 젖음을 감수하면서도 시야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 아니면 자신감 충만한 사람? 아니면 엇갈리듯 지나치는 우산 쓴 사람들의 부딪침을 배려하는 사람?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선택을 반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산의 각도에도 마음은 숨어 있는 듯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앞으로 조금 기울어진 우산은 아직 오지 않은 비를 먼저 막으려는 마음 같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한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오지도 않은 슬픔까지 미리 견디며 살아간다.

뒤로 젖힌 우산은 이미 지나간 빗줄기를 흘려보내는 사람을 닮았다. 어제의 비는 오늘의 우산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걸음은 조금 가볍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때는, 그것이 모두 습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몸은 마음보다 먼저 삶을 기억한다.

손잡이를 쥐는 힘, 어깨의 기울기, 걸음의 속도, 우산을 드는 높이. 그것들은 수없이 지나온 날들이 몸에 남긴 흔적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이미 몸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내 우산을 바라본다.

손잡이를 조금 세게 쥐고 있다.

우산도 조금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나는 무엇을 그렇게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아왔을까? 잃을 것도 없는데.ㅠㅠ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오늘부터 막아내려 애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빗소리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는 비가 우산을 두드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비가 내 마음을 두드리는 것처럼 들린다.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온다.

그의 우산은 뒤로 조금 젖혀져 있다. 어깨는 이미 젖어 있는데도 걸음은 느긋하다. 그는 비와 함께 걷는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살아온 시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같은 비를 내린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비를 시련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추억이라 부르며, 어떤 이는 기다리던 계절이라 부른다.

달라지는 것은, 비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나는 우산을 조금 들어 올린다.

좁았던 시야가 열린다.

빗물에 씻긴 가로수가 보이고, 추어탕집 간판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보이고, 인도 턱의 아래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으며 장난치는 아이가 보인다.

세상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좁았던 것은 내가 들고 있던 우산의 각도였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나는 여전히 우산을 들고 걷는다.

하지만 조금 전의 나는 아닐 것이다. 의식하며? 타인의 시선에 대한.

비 오는 날은 비를 피하는 날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조용히 마주하는 날?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오래 굳어 있던 내 마음의 모서리들이 빗물에 조금씩 닳아 둥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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