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비를 들었다.

by원성진 화가

여름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첫 숨을 내쉬듯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먼 곳에서 누군가 마른 종이를 한 장씩 넘기는 듯한 소리였다. 이내 빗방울은 닿이는 모든 곳을 두드리고, 나뭇잎을 스치고, 아스팔트 위에서 조용히 부서지며 세상을 젖게 만들었다. 창문을 아주 조금 열자 눅눅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피부 위로 차가운 숨결 하나가 살며시 손을 얹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선풍기 스위치를 눌렀다.

윙-------

날개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땀은 식었지만, 동시에 창밖에서 들려오던 작은 우주의 소리도 함께 사라졌다. 귓가에는 오직 일정한 기계음만 맴돌았다.

나는 잠시 선풍기를 바라보다가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툭.

날개가 천천히 멈추고,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되찾았다.

빗방울 하나가 창틀을 두드리고, 또 하나가 나뭇잎 끝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처마 끝에서는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었고, 골목의 빗물은 작은 개울이 되어 졸졸 발끝으로 흘러갔다. 멀리 천둥은 구름 속에서 낮게 몸을 뒤척였고, 풀벌레들은 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놈들은 잠시만 비가 멈춰도 다시 울어 된다.


그리고 그때,

비는 소리보다 먼저 향기로 내 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비가 오면 물비린내를 떠올리지만, 내게 장마는 언제나 흙냄새로 시작된다. 메마른 대지가 첫 빗방울을 받아들이는 순간, 흙은 오래 참아온 숨을 한꺼번에 내쉰다. 햇볕에 그을렸던 흙알갱이들이 젖으며 피워 올리는 향기. 그 냄새는 코끝을 스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오래된 기억을 깨운다. 어린 날 맨발로 흙길을 뛰어다니던 오후, 처마 밑에서 비를 바라보던 시간, 젖은 흙을 손으로 만지며 웃던 계절들이 향기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


빗소리를 오래 듣고 있으면 숨이 깊어진다.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풀리고, 목덜미를 감싸던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피부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천천히 받아들이고, 팔 위의 솜털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조용히 일어선다. 마치 잠들어 있던 세포 하나하나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몸속 어딘가에서 생명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선풍기의 날개소리에, 에어컨의 시원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소리를 잃고 살아왔는지를.

편리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계절의 냄새를 지나쳐 왔는지를.


오늘 밤 나는 선풍기를 껐다.

조금 덥더라도 괜찮다.

그 대신 여름이 내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흙이 피워 올리는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며, 빗방울 하나하나가 피부에 닿기도 전에 마음을 적시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장마의 첫 비가 찾아온 밤, 선풍기 하나를 끄고 귀를 기울이는 일.

그 작은 선택 하나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고, 피부의 솜털이 조용히 일어서며, 잊고 지내던 나의 감각들이 다시 세상과 인사를 나눈다.


오늘 밤, 나는 비를 들었다.

오늘 밤. 나는 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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