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으로 향하는 길

by원성진 화가

그라츠를 떠나 빈으로 향하는 길.

다시 알프스의 장엄한 산맥이 창밖으로 펼쳐졌다. 차창에는 옅은 입김이 맺혔고, 유리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설산의 윤곽은 흐릿한 빛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덜 깬 아침의 공기에는 차가운 금속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이 섞여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맥 위에는 엷은 안개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자연과 인간, 과거와 미래, 기억과 변화가 하나의 풍경 안에서 조용히 겹쳐지고 있었다. 눈 덮인 봉우리와 오래된 마을들, 그 사이를 가르는 강물과 철길의 직선은 서로 다른 시간들이 한 화면 위에 포개져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고 있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변화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리듬 같은 것이 존재했다.


우리는 종종 변화를 두려워한다.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오래 믿어온 자신이 흔들리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명이란 어쩌면 끊임없이 변해가는 흐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고.

눈은 녹아 강이 되고, 강은 다시 바다로 흘러간다. 계절은 끝없이 형태를 바꾸고, 인간 역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인간은 세계와 분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빛의 온도를 피부로 느끼며, 타인의 말과 침묵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바꾸어 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와 끊임없이 서로의 흔적을 주고받는 일이다.


존재는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된다.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자신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긴 침묵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견뎌낸다. 누군가는 예술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또 누군가는 낯선 도시를 오래 걸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천천히 이해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평생에 걸쳐 자기 자신의 문장을 완성해 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차는 산맥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짧은 어둠이 차창을 덮쳤고, 다시 빛 속으로 나올 때면 설산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번져왔다. 그 반복 속에서 이상할 만큼 마음이 고요해졌다. 어쩌면 인간의 삶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어둠 속을 지나더라도, 다시 자신만의 빛을 향해 흘러가는 일.

알프스의 웅장한 산맥과 그라츠의 낯선 조화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차가운 공기, 강물의 냄새, 돌길 위를 스치던 발걸음의 감각, 전시장 안을 채우던 낮은 전자음과 희미한 숨소리까지도 시간 속 어딘가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기억은 결국 풍경의 다른 이름이다.

풍경은 사라져도, 그 순간의 감각은 몸 안에 오래 남는다. 어떤 공기의 온도, 어떤 빛의 결, 어떤 날의 침묵은 시간이 지나도 문득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때의 사유는 인간 안에서 작은 불빛처럼 계속 흔들리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흔적일 것이다. 여행은 장소를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에 이전과는 다른 호흡 하나를 남겨두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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