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스트하우스 그라츠

by원성진 화가

그렇게 알프스를 지나 도착한 곳은 오스트리아의 도시, 그라츠였다.

처음 마주한 그라츠는 묘한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이른 저녁의 공기에는 오래된 석조 건물에서 배어 나오는 차가운 돌 냄새와 강가의 습기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붉은 지붕 위로 스치는 바람은 서늘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트램의 금속성 마찰음이 도시의 정적 위를 천천히 긁고 지나갔다.

중세의 흔적을 간직한 오래된 건물들과 현대 건축물은 한 공간 안에서 충돌하지 않은 채 서로의 시간을 조용히 견디고 있었다. 낡은 벽면의 균열과 유리 건물 위를 미끄러지는 빛이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기억이 그렇듯, 도시 역시 현재의 감각으로 끊임없이 다시 해석하고 있었다.


뮤르 강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현대미술관 쿤스트하우스 그라츠가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그것을 마주했을 때, 마치 물속 생명체가 도시 한가운데 숨을 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 표면 위로 흐르는 빛은 젖은 피부처럼 반짝였고, 둥글게 부풀어 오른 외벽은 살아 있는 유기체의 몸체처럼 미세한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침입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은 도시가 스스로를 새롭게 감각하기 위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감각 기관처럼 느껴졌다.


강물은 낮게 흐르고 있었고, 강 위를 스치는 바람은 셔츠 끝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래된 건물의 그림자와 미래적인 건축물이 같은 햇빛 안에 놓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전통과 현대는 서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빛 같다.

인간 역시 그렇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변화 속에서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익숙한 자신 안에만 머무를 때보다, 흔들리고 낯설어질 때 더 깊이 숨 쉬게 된다. 정체성이란 끊임없이 흔들리고 협상되며 다시 형태를 바꾸는 흐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삶 역시 그렇다.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고, 살아가며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전자음과 낮게 울리는 진동, 어딘가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숨소리 같은 사운드가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어두운 벽면 위로 떠오르는 디지털 이미지들은 마치 살아 있는 기억의 파편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바닥에 번지는 빛은 물결처럼 발끝을 스치며 흔들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센서가 반응했고, 시선이 닿는 순간 이미지가 변형되었다. 손끝의 움직임 하나가 공간의 소리를 바꾸고, 몸의 방향에 따라 빛의 흐름이 달라졌다. 작품은 인간의 몸과 함께 완성되는 하나의 살아 있는 환경처럼 느껴졌다.


디지털 이미지와 빛, 데이터가 얽힌 공간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졌다. VR과 미디어 아트는 인간의 감각을 다시 열어젖히는 또 하나의 문에 가까웠다. 인간은 그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느끼고, 몸의 경계를 다시 의식하게 된다. 눈으로만 세상을 인식하던 감각은 점점 몸 전체로 확장된다. 빛의 떨림이 피부에 닿고, 소리의 방향이 호흡의 리듬까지 바꾸어 놓는다.

어쩌면 현대의 동굴은 스크린과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허상이냐 실재냐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해 왔다. 그렇다면 디지털로 생성된 감각 역시 또 하나의 현실일 수 있다.

모든 허상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또 하나의 실재인지도 모른다.


전시된 작품들은 전쟁과 난민, 환경 파괴와 인간 소외 같은 시대의 상처들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고 있었다. 차가운 화면 속에서도 인간의 불안과 외로움, 기억과 상실은 선명한 체온처럼 살아 있었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마저 조용해졌다. 어두운 영상 속에서 반복되는 숨소리와 깨지는 노이즈를 듣고 있자니, 마치 누군가의 상처 깊숙한 곳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예술은 현실을 끝내 외면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나 예술 속에서만큼은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사라질 감정을 붙잡고, 지나간 기억을 현재로 불러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한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가장 섬세한 시간의 언어다.

그것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영원을 숨 쉬게 만든다.

작가의 이전글알프스의 빙하가 만든 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