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베네치아를 떠나는 순간부터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천천히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직 덜 깬 도시의 공기에는 물 냄새와 오래된 돌벽의 차가운 습기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수로 위를 스치는 바람은 얇고 서늘했으며, 물결은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떠남과 도착, 익숙함과 낯섦, 지나온 나와 아직 만나지 못한 나 사이의 간격이 마음속 어딘가를 조용히 흔들었다. 떠난다는 것은 한 시절의 자신을 뒤에 남겨둔 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새로운 자신에게 천천히 걸어가는 일이다. 인간은 언제나 두 존재 사이를 이동하며 살아간다. 이미 지나온 자신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신 사이에서.
물결이 찰랑이는 아드리아 해를 뒤로하고 알프스를 향해 가는 길, 창밖의 풍경은 한 장의 그림이 다른 그림 위로 천천히 덧칠되듯 변해갔다. 낮은 땅은 점점 높아졌고, 공기에는 차가운 금속 같은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산맥의 윤곽은 점점 선명해졌고,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얹은 봉우리들이 햇빛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설경은 깊고 고요했다. 빛을 머금은 흰 산맥은 마치 신이 아주 오랜 세월 침묵만으로 그려낸 거대한 수묵화 같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의 소음이 조금씩 멀어지고 내 안의 생각들까지 희미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산맥은 길을 따라 거대한 벽처럼 솟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위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가 미처 닿지 못한 오래된 질서를 품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 자연은 인간이 스스로를 과장하지 않도록 조용히 균형을 되돌려 놓는 존재.
우리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세우고, 끝없이 무언가를 증명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수천만 년의 시간을 견뎌낸 산맥 앞에 서면 인간의 모든 확신은 아주 잠시 빌려 쓰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바람 한 줄기에도 지워질 수 있는 문장.
그 침묵 앞에서 인간은 작아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작아짐 속에서만 자신을 가장 정확히 바라보게 된다. 인간은 세계의 중심일 때보다, 세계의 일부임을 깨닫는 순간 더 깊어진다. 작아진다는 것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중간에 잠시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흘러든 강물을 바라보았다. 비취색의 물결은 그야말로 물감을 탄 물 같았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햇살은 잘게 찢긴 유리 조각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차가운 공기 사이로 물 흐르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물은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인간보다 오래 남아 흐를 것이다.
그 앞에 서 있으니 문득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인간은 결국 사라질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는 걸까.
우리는 기록하고, 사랑하고, 창조한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무언가를 남기려 한다. 어쩌면 예술이란 유한한 존재가 시간의 흐름 앞에서 두 손으로 작은 불빛 하나를 지켜내려는 행위 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영원을 소유할 수 없기에 대신 순간에 의미를 새겨 넣는다. 그림을 그리고, 문장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세계 어딘가에 조용히 묻어둔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아름다움을 만들려 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란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계속해서 수정되는 원고에 가깝다는 것을.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끝없이 고쳐 쓰는 존재다. 어떤 날은 무너지고, 어떤 날은 새로운 문장을 덧붙이며, 또 어떤 날은 오래도록 믿어왔던 자신 안의 문장을 스스로 지워낸다.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퇴고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라는 문장을 천천히 수정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