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빛 아래 콜로세움

by원성진 화가

마침내 콜로세움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나는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몸은 멈추지 않았지만, 의식은 그 자리에 고정된 듯하다. 햇빛에 잠긴 거대한 형상은 시간이 스스로를 조각해 만든 하나의 생명처럼 서 있었다.


빛이 닿은 돌의 표면은 살아 있었다. 거칠게 깎인 흔적, 깊게 파인 균열, 부서진 가장자리.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이것은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남기고자 하는 의지’, 그 집요한 욕망이 형태가 되어 이곳에 서 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빛이 동시에 폐 안으로 스며든다. 서로 다른 감각이 한 몸 안에서 겹쳐지는 순간, 지금이라는 시간이 유난히 또렷해진다.


시간은 정말 흐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흐르고 있는가?

어제와 오늘은 과연 다른가? 이 질문은 머리로 떠오르지 않는다. 피부 위로, 호흡 사이로, 발바닥 아래에서 서서히 올라온다.


이곳에 서 있는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수천 년 전 이 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감각과 얇게 겹쳐진 상태다. 시간은 이어지지 않는다. 겹쳐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를 무심히 걸어간다.


햇살이 쏟아진다. 아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이 사선으로 흘러내리며, 이 공간을 조용히 해부한다. 숨겨진 것들이 드러난다. 돌의 상처, 시간의 균열, 사라지지 못한 흔적들.


빛은 잔혹하다. 아무것도 숨겨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잔혹함 속에서, 모든 것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드러난다. 나는 그 앞에서 서서히 떨린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 안쪽에서 걸린다.


딱 죽기 싫은 날이다.

이런 날에,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살아 있다는 감각이 이토록 선명한 순간. 숨 하나, 시선 하나, 피부에 닿는 빛의 온도까지, 모든 것이 과하게 또렷하다. 삶이란 결국, 이처럼 벗어날 수 없이 생생한 감각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푸르다. 단순하지 않다. 빛의 농도에 따라 깊이가 달라지는, 끝없이 열려 있는 층.


그 아래, 이 거대한 원형의 공간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겹쳐 있다.

환호와 비명, 승리와 패배, 삶과 죽음.

모든 극단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지우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나는 눈을 감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이 바라본다.

비극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꾸어 남는다. 그리고 그 잔여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한다.


발을 내딛는다. 돌바닥이 단단하게 발을 받친다. 그러나 완전히 안정적이지는 않다.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깨닫는다. 균형은 끊임없이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다.

이 바닥 위에는 수없이 많은 발걸음이 스며 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압력들. 나는 그 위에 또 하나의 무게를 더한다.

존재란, 지나간? 지나온? 흔적이다. 또한 사라진 이후에도, 세계 어딘가에 남아 있는 압력.


이곳은 무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죽음이 쌓여 생명이 되고, 파괴가 겹쳐 창조가 된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한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은 더 선명해진다.

나는 그 경계에 선다.

빛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닌 자리.

그곳에서 비로소 보인다. 인간 역시 하나의 균형이라는 사실이.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흔들리는 상태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중앙에 다다른다. 아무 소리도 없다.

그러나 이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수많은 소리가 겹쳐져,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상태.

나는 몸으로 듣는다. 공기의 밀도, 공간의 깊이, 보이지 않는 파장.

침묵은 가장 깊은 소리다. 모든 것을 삼킨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진동.


다시 걸음을 옮긴다. 벽의 틈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바닥 위에 길게 놓여 있다.

나는 그 위를 지난다. 빛을 밟는 순간, 시간을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틈 사이로 스며들어 우리를 비춘다. 그래서 과거를 본다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아치 위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본다. 이곳은 심장이었다. 권력의 중심이었고, 인간의 욕망이 가장 크게 뛰던 자리.

지금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 모든 것이 남아 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 역시 남겨야 한다고. 무언가를. 형태로, 혹은 흔적으로. 고통을 통과한 아름다움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삶 위에, 빛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문장을 새겨야 한다고.

인간은 결국 자기 서사를 쓰는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그 첫 문장은

언제나 지금, 이 눈부신 순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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