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된장찌개

by원성진 화가

버스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려선 골목은, 처음 보는 풍경이면서도 이미 오래 알고 있던 장면처럼 느껴졌다. 발걸음이 그곳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돌바닥의 미묘한 기울기, 벽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깊이, 공기가 머무는 높이까지도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 감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익숙함은 몸이 먼저 알아보는 어떤 결일지도 몰랐다.


쇼윈도 앞에 서자, 유리 위로 겹쳐진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의 거리,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나의 모습. 투명한 표면 위에서 서로 다른 장면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 속의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이 도시를 통과해 온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눈빛은 약간 느려져 있었고, 어깨의 힘은 조금 풀려 있었다. 그 변화는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 도시가 나를 통과해 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감각들이 그 증거처럼 느껴졌다. 눈으로 본 것보다, 피부와 호흡이 기억하는 것이 더 또렷했다.


인간은 장소를 기억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장소가 우리를 기억하게 만든다. 돌의 질감이 손끝에 남고, 빛의 방향이 눈 안에 자리 잡고, 공기의 냄새가 호흡 속에 스며든다. 그 감각들은 사라지지 않고, 몸 어딘가에 조용히 축적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런 예고 없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기억은 몸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도시의 외곽으로 향하는 길, 공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중심부의 밀도 높은 소음이 사라지고, 대신 더 넓은 여백이 느껴졌다. 목적지는 분명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과정이 더 길게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며들었다.


아시아 식자재 마트의 문을 여는 순간, 향이 몸을 감쌌다. 향신료 냄새, 된장의 깊고 묵직한 냄새, 김치의 발효된 산뜻함, 라면 봉지에서 은근히 새어 나오는 기름진 향기.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감각을 자극했다. 눈으로 보기 전에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물건을 하나씩 손에 들었다. 포장의 질감, 무게, 손에 닿는 온도가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 익숙함이 나를 멀리 데려갔다. 서울의 어느 부엌, 끓는 냄비 위로 올라오던 김, 식탁 위에 놓인 반찬들. 공간은 여전히 로마였지만, 감각은 이미 다른 장소로 건너가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일행들이 쌀을 씻었다. 물속에서 손을 움직일 때 느껴지는 쌀알의 마찰이 손끝에 또렷하게 전해졌다. 물이 흐려졌다가 다시 맑아지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냄비에 불을 올리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끓어오르는 소리, 올라오는 김, 공기 중에 퍼지는 향. 그 모든 것이 천천히 공간을 채워갔다.


창밖에는 로마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거리의 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식탁 위에는 전혀 다른 시간의 층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앉아 한 숟갈을 떴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온기가 먼저 퍼졌다. 그리고 곧바로 익숙한 맛이 따라왔다. 그 맛은 수많은 시간들이 응축된 감각이었다. 어린 시절의 식탁, 가족의 목소리, 반복되던 일상의 리듬. 그것들이 한순간에 펼쳐졌다가,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때, 공간과 시간이 겹쳐졌다. 로마의 밤과 나의 과거가 한 자리에서 만났다. 서로 다른 두 흐름이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익숙함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다. 평소에는 당연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때는 또렷하게 드러난다.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돌길 위를 걸었다. 밤의 공기는 낮보다 더 깊었다. 발걸음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가 사라졌다. 발자국은 남지 않았지만, 감각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오래된 벤치 옆을 지나며, 그 위에 앉아 있었을 사람들의 체온을 상상했다. 광장을 스쳐 지나던 발걸음들,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을 수많은 순간들. 그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짧은 호흡 속에서,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날, 로마는 하나의 길을 내게 건넸다. 그것은 감각으로 이어진 흐름이었다. 나는 그 위를 걸으며, 보이지 않는 선율을 따라가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지만, 분명한 리듬이 있었다. 소리 없는 물결처럼.


그 리듬 속에서, 나의 시간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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