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여행을 꿈꾸며 샀던 검은색 싸구려 백팩이 있다. 비행기 선반에 있을 줄 알았고, 낯선 도시의 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릴 줄 알았으며, 밤기차 안에서 베개 역할 쯤은 해줄 줄 알았던 가방이다. 그러나 현실은 조용했다. 여행은 가긴 하지만 자주 오지 않았고, 백팩은 방 한구석에서 계절처럼 쌓여갔다. 그리고, 먼지가 여행의 흔적 대신 쌓였다.
요즘 그 백팩이 다시 출근한다. 목적지는 세계 일주도, 해외의 골목도 아닌, 집 근처 편의점이다. 밤이 깊어지고, 맥주 생각이 날 때 냉장고 안에 맥주가 없다.ㅠㅠ 정확히 말하면, 냉장고 맞은편에 술장고가 있는데, 그 술장고 안에 맥주가 없다. 소주나 양주가 있어도, 맥주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때, 나는 그 가방을 메고 나선다. 할인 스티커가 붙은 맥주를 만나러 가는 짧은 탐험이다.
신기하게도 이 백팩은 6캔 묶음 세 팩을 정확히 받아낸다. 설계자의 의도를 넘어선 완벽한 수용력이다. GS 굿딜로 3프로 할인도 잊지 않고^^ 결제가 끝나면, 나는 여행자가 되고, 편의점 문은 국경을 넘는 통로가 된다.
돌아오는 길은 묵직하다. 어깨로 전해지는 무게가 분명하다. 9kg. 영하의 공기, 맨발에 슬리퍼라는 조합은 분명 무모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춥지 않다. 등 뒤의 무게가 체온을 끌어올리는 것 같다. 마치 “괜찮다”라고,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라고 가방이 먼저 말해주는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라는 건 꼭 멀리 가야만 성립하는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갔느냐보다, 무엇을 싣고 돌아오느냐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특히나 술을 이고 지고 올 때는.
오늘의 나는 맥주 9리터와 하루치 피로, 그리고 약간의 성취감을 싣고 귀가한다.
백팩은 여전히 여행용이다. 다만 목적지가 달라졌을 뿐이다. 비행기 대신 슬리퍼, 면세점 대신 편의점, 지도 대신 할인 스티커. 그래도 그 가방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삶은 가끔 이렇게 우회해서 우리를 만족시킨다. 여행을 못 간 대신, 나는 오늘도 무사히 다녀왔다. 집까지. 그리고 냉장고 앞까지.
여행은 이렇게 짧게도 가능하지 않나요? ^^
맥주는 마시기 전부터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