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잔혹함 속에서 질서를 찾는 법

by청년 클레어

세상에 횡횡하는 범죄들, 해괴망측한 정치 위정자나 지도자들, 끔찍한 자연재해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들을 볼 때면 인간들은 항변하곤 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허용되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저는 역설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끔은 회개토록 돌이키는 '앗수르의 몽둥이'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도우시는 것은 좋은데, 꼭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셔야 했느냐는 질문 말입니다. 물론 여기선 의인을 쓰시고자 허락하신 성숙의 연단과 순교자처럼 사명을 위한 고통 등은 열외로 두고 <죄에 대한 징계>로서의 고난만 국한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런 주제를 사색할때면, 가끔 극심하게 잔혹하고 무서운 공포영화나 전쟁, 폭력 영화ㅡ개인적으론 상당히 기피하는 장르입니다ㅡ를 연상합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던져질 지옥이 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잔혹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 땅에서 차선바카라을 내미신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용하시는 고통과 수고, 고난의 임계치는 어디까지일까요? 제3자가 보기에도 정말 저주가 임한 듯 보이는 누군가의 개인사를 보면, 답답함에 위로조차 건네기 먹먹한 일들을 마주할 때도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에는 더 찬연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예비케 하시는 섭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득 전쟁, 부조리, 이해불가 인간 군상들의 난립, 모순과 비리, 빈부격차 등 생각만 해도 두통이 밀려오는, 죄로 오염된 인간들이 배출한 오폐수들을 떠올려 보는 하루입니다.


이런 날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의 질서, 하루의 질서, 인생의 질서를 새롭게 합니다.











[생생큐티] 2026년 7월 10일(금)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이사야 10장)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25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사 10:24-27)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이사야서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호명하신 이 한 문장은, 앗수르의 횡포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일과 견주어 보면 참 모순된 지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패를 심판하기 위해 앗수르라는 막대기를 드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온(Zion)은 단순히 지리적인 예루살렘 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머무는 거룩한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근데 이 모순은, 하나님의 징계의 속뜻을 헤아리면 해소됩니다. 즉 앗수르를 통한 징계는 자식을 버리거나 멸망시키기 위한 사형 선고가 아니라, 엇나간 자식을 바른길로 돌이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은 회초리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세상(앗수르)은 이스라엘을 마음대로 짓밟고 삼킬 수 있는 쉬운 먹잇감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비록 지금 매를 맞고 있을지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바카라임지고 사랑하는 나의 소유, 내 백성이다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앗수르가 쳐들어오자 애굽(이집트)으로 도망치려 하거나 세상의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 이란, 극심한 심판과 환난 속에서도 우상과 세상의 헛된 권력을 좇지 않고, 믿음의 자리를 지켜낸 소수의 진실한 성도들(남은 자)을 가리키는 영광스러운 호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믿지 못 하고, 때마다 타협하고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실제 역사 사료를 통해 앗수르라는 나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성으로 전쟁에 임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참고서에 따르면, 앗수르 왕들의 연대기와 벽화 부조들에 기술된 앗수르의 행태는 적군이나 피정복민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심어주어 싸울 의지 자체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니, 그들은 의도적으로 가장 잔인한 형벌을 자행하고 이를 널리 홍보했습니다.


가령 앗수르 군대는 반역한 성읍을 점령하면, 그곳의 지도자들과 반항하는 자들을 붙잡아 산 채로 피부 가죽을 벗겼습니다. 심지어 피 묻은 가죽을 성벽이나 기둥에 널어 전시했다고 합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유명한 라기스 부조(Lachish Reliefs, 산헤립 왕 시대)를 보면, 앗수르 군인들이 포로들을 날카롭고 긴 나무 말뚝에 산 채로 관통시켜 성문 밖에 세워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해골 탑을 쌓고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일상이었습니다. 앗수르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연대기에는 "나는 반역자들의 목을 베어 성문 앞에 탑처럼 쌓았다", "청년들과 아이들을 불태웠다", "많은 포로의 눈을 뽑고 귀와 손발을 잘랐다"는 기록이 마치 자랑인 양 적혀 있습니다.


항복한 백성들을 강제 이주 시킬 때는, 짐승처럼 코나 입술에 낚시바늘 같은 쇠고리를 꿰고 밧줄로 묶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이방 땅으로 끌고 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앗수르의 잔혹성을 역사적 자료로 훑어본 후에 다시 이사야서 10장 24절-25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수천 년이 지난 후대의 사람인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마치 드라마 사극이나 영화를 보듯, 비현실적인 상상 속 사건으로 대충 훑고 지나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 한 말씀 한 말씀을 깊이 곱씹고, 역사적 현장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듯 꼼꼼히 살펴보면, 당시 그 공포의 현장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비로소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앗수르라는 나라가 풍기는 잔혹성과 위압감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의 시스템, 트렌드, 환경과도 참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이 거대한 앗수르의 풍채 앞에서 조금만 잘못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고, 코에 쇠고리가 걸린 채 평생 빌어먹으며 비천하게 살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망하고 잔혹한 희생물로 나가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은, 치열한 경쟁 슬롯 속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끝없는 불안, 장래에 대한 걱정과 결을 같이합니다.


구약 농경슬롯에서 농사의 열매는 한 개인과 가족, 나아가 공동체와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하는 생존이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풍년만 보장될 수 있다면 이방신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이방인들의 풍요에 대한 동경과 '트렌드를 못 따라가면 도태되어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이었을 것입니다.


개인들이 자꾸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미신, 주술을 좇는 이유도 그 기저에 이러한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며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숭배를 향해 혀를 차며 비판하지만, 본질적으로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일을 우리 역시 일상에서 자주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려 노력합니다. 오전 8시 전에 새벽 기도와 그날의 말씀을 읽고, 새벽 설교 영상과 말씀 본문에 참고가 될 만한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간이 2~3시간씩 들어가다 보니, 새벽 4~5시에 일어나도 때로는 큐티 내용을 타이핑하여 기록하는 마무리를 다 짓지 못한 채 오전이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그런 날은 바쁜 근무 시간에 휘둘리다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마무리를 짓는 날이 생깁니다. 물론 큐티를 대충 하지 않고 깊이 묵상하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그런 날은 마치 내가 '바쁜 일상'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밀려난 듯한 께름칙함과 하나님을 향한 죄송함이 밀려듭니다.


매일의 경건 생활은 단순히 하루의 우선순위를 점하는 일을 넘어, 내 삶에서 성취해야 할 일들,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인간관계, 그리고 내 돈이 흘러가고 소비되는 주제들을 점검하게 만듭니다. 저는 기도와 말씀에 집중도를 통해, 종종 '나는 정말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가' 자문해 봅니다.


마치 앗수르의 공포스러운 위협 앞에서 먹고사는 일, 매일 해치워야 할 온라인 게임 업무와 프로젝트에 겁에 질려 질주하는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잔재미를 자극하는 각종 SNS 콘텐츠, 정보, 지식, 소식, 영화, 드라마 등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 '이 재미를 당장 즐기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다'는 자기애적 충동에 휘둘려 우리를 질주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교만과 탐욕, 이기심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살다가, 앗수르라는 몽둥이를 통해서야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제야 죄와 두려움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하루의 우선순위와 질서, 나아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매를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로마서 1장의 말씀처럼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둠을 당하는 이른바 '살아서 받는 심판'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강대국의 권력, 엄청난 부, 압도적인 시스템(앗수르)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모든 힘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끼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를 위협하는 세상의 몽둥이가 아니라, 그 몽둥이를 쥐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세상의 힘을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진실하게 의지하는 남은 자로 서기를 간구합니다.


이를 위해, 제가 온라인 게임 일, 결혼 후의 집안일, 교회 일, 봉사, 친정 가족 대소사, 스터디카페 도와주기, 그리고 언니위해 테스트중인 콘텐츠 등 여러 가지 얽힌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우선순위를 잘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기도, 큐티 묵상과 큐티 타이핑 기록까지 오전에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루의 십일조를 드리듯 매일 2~3시간씩 기도와 말씀 묵상, 성경 통독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노아처럼 믿음의 방주에 단단히 닻을 내리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