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을 지키는 신학생?

은혜를 낭비하지 않는 겸손이 탐욕을 이긴다

by청년 클레어

혼전순결을 지키는 성도 아니 신학생은 바보일까요?


대학 시절, 미국 남성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다.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거나 포르노 영상 등을 보거나 심지어 야동 중독인지를 알아보는 조사였다.


(불신자가 아닌 크리스챤 남성들 상대였는데) 응답자의 50% 이상이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고 포르노(야동) 중독으로 살아간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익명 조사였음에도 나름 자신들을 포장했을 텐데, 이 수치는 현실을 덜 반영했을지언정 과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사람들은 다윗왕도 간음했지만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은혜'를 강조하곤 한다. 나도 그 점에는 깊이 동의한다.


하지만 아는가? 내가 온라인카지노스토리에 야고보서처럼 '믿음과 행함' 강조하려는 이유를 말이다.


교만한 자들은 말한다. 너는 깨끗하냐고? 그래, 난 천재 만나기전까지 혼전순결 지켰다고 말하면 또 공격한다. 왜 자기의를 주장하냐고 말이다. 애초에 그들은 받아들일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다.


말하는 화자를 폄하하며, 어떻게든 공격하려는 자들의 깊은 의도엔 실은 <이중생활>이란 비릿한 실체가 있곤 한다. 2000년전 위선자들도 예수님을 공격했는데, 죄와 허물이 허다할 인간 화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 경우,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실은 개인 기도 생활에서 회개를 굉장히 많이 하고 스스로 잘못이라 생각하면 인정과 회개가 상당히 빠르다. 이게 하나님께 (자범죄로 초래한) 고난 훈련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던 이유 같다. 자주 회개와 칭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치고 진실한 회개에 잇닿아 있는 경우는 드문듯 하다. 진짜 회개생활을 치열하게 하는 이들은 은혜의 무게감을 알기에 입이 무겁다.


바야흐로 죄를 지은 당사자가 오히려 은혜와 용서를 강요하듯 강조하는 세상이다. 십자가 은혜 앞에 한없이 불의한 것도 교만이지만, 죄를 짓고도 뻔뻔하고도 손쉽게 은혜팔이를 하는 것도 십자가 은혜의 숭고한 가치를 싸구려로 폄하하는 교만이다. 영화 밀양의 성폭행범처럼 말이다.



7~8년전엔가, 내가 다니는 (지금의) 교회에서도 한 (남자)청년이 2명 이상의 자매들과 혼전 간음을 한 희대의 사건이 있었다. 근데 지금까지 거이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해당 자매가 그때 나에게 고해성사하듯 고통을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후 교회를 떠나 타 교회로 갔으나 결국 몇 년간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된 일련의 사건을 남몰래 말해 주었다. 자매의 가족들과 나의 줄기찬 권유로 몇년전부터 집근처 교회에 다시 나가고 있어 다행이다, 여전히 미혼이다. 참 착하고 예쁜 자매였는데,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 자매 문제는 나 역시 (당연히) 교회 교역자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교회'를 표방하는 분위기에 흠결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매끄러운 파티에 스크래치를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입을 막고 죄와 문제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것일뿐 실은 문제가 없는 교회는 아닌데도 말이다. 그때부터일까, 그냥 대형교회에서는 말을 줄이고 인간관계도 '친절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굳이 이슈에 말려들지도, 이슈를 만들지도 말고 지내야 겠다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우아하고 완벽한 교회을 표방하는 공동체에선, 인간은 당연스레 (어는 정도 가면을 쓰고) 우아한 성도를 견지하기 마련이다.


그 형제는 혼인빙자 간음처럼 당장 결혼할 것처럼 말하다가, 결국 양다리를 걸친 다른 자매와 결혼을 해버렸다. 그것도 몇 개월 차이도 안 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우린 평안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분위기라 가끔 답답할 때가 있다. 물론 진실을 말해야 하는 교회라고 해서, 죄를 무분별하게 들추는 것은 현대교회 특성상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소중히 다루고 지켜줄 성숙함을 모두가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밀한 이야기들은 프라이버시로 덮어두고 상식선의 문제들만 다루는 것도 온전한 것 같진 않다. 거룩한 성경에도 동성애에 수간까지 나오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 자매의 말로는 (거의 7-8년 전 일인 것 같다) 본인 소속된 봉사모임 찬양팀 리더였던 메인 싱어 형제도 간음을 했다고 한다. 그 상대 자매 역시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심지어 신학생 신분 사이에서도 비집고 들려오는 이슈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성적인 문제는 오픈하기가 어려워 교역자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 역시 그 자매의 프라이버시와 간곡한 부탁 때문에 어디에도 말을 전할 수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사람(상기 형제)들이 "가끔은" 다윗의 간음과 용서 말씀을 "너무도 손쉽게 인용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논하며 식음을 전폐하는 처절한 회개와 그에 상응하는 쇄신과 변화가 있는 걸까? 물론 믿음과 회개의 진정성 등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판단하실 수 있다. 그저 성경말씀처럼 일반론을 말하고자 함이다.


물론 혼전순결 등 행위의 온전함이 구원의 전제 조건은 아니다. 인생을 살며 영적, 육적으로 죄를 지었다고 해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자바카라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룟 유다처럼 악한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앞서 말한 영화 <밀양>의 범죄자처럼 값싼 은혜를 남발하며 뻔뻔하게 행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를 아끼셨던 것은 그들의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겸손 덕분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선구안이 생겼던 것이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겸손은 회개의 진실성에서 나온다. 또한 이런 겸손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바카라망에 수용적인 특징이 있다. 자기는 일절 회개하지 않으면서 무슨 칭의를 말하고 죄 사함의 감격을 말한단 말인가.


가끔 크리스챤중 본인이 더 바리새인이면서 바리새인을 공박하는 모순을 볼 때면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


정욕을 포함 탐욕의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천국 소망'으로 귀결된다. 이 땅에서 죄의 유혹을 이길 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천국 소망, 그리고 심판에 대한 경외심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악해서 자기 자신의 의지나 의로움으로는 절대로 죄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내가 청년의 때에 상대적으로 혼전순결이나 여러 도덕률을 지키는 데 수월했다면, 그것은 내가 남들보다 의로워서가 아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치열한 기도와 말씀 생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기도와 말씀 생활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주일성수와 십일조처럼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경외심의 일상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손해 보기 싫어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영육 간 쾌락을 즐길 만큼 즐기고 싶어 하는 탐욕이나 정욕과도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지금 영적, 육적으로 죄의 유혹을 받고 있거나 이미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고 다시 십자가로, 그리고 천국 소망으로 믿음의 닻을 새롭게 내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인간 안엔 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날마다 처절하게 예수님만을 붙잡게 된다. 매일이 회개의 삶인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타인 눈의 티끌만 찾느라 궁색한 논리로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은혜의 여정으로 나와 우리 모두를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생생큐티]2026년 5월 27일 (수)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히브리서 10장)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34-39)


오늘 말씀에선 신앙의 거대한 교리를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적으로 살아낼 것인가를 녹여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당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적으니 간단해 보이지만, 주후 60년대 중후반에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 가족, 생계,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슬롯적 자살 행위'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단행하며 믿음을 지켜낸 것입니다.


특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원래 속해 있던 유대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당해야 했습니다. 회당에서 출교를 당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철저한 종교 슬롯였던 유대 슬롯에서 완전히 매장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가족들조차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호적에서 파버렸고, 아예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 가짜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유대 슬롯에서 추방당하면 모든 상거래가 중단되므로, 사실상 온라인 게임을 잃고 극심한 빈곤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지만, 로마 제국은 유대교를 합법적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자신들과 다른 이단으로 철저히 분리하자, 로마 역시 기독교에 씌워져 있던 보호막을 거두고 전 재산 몰수와 피바람 나는 순교를 자행하는 극심한 핍박을 시작합니다.


이 모든 고통과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며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다 해도, 카타콤과 같은 지하 도피 생활이나 매일 피 말리는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나 혼자 견디는 것도 벅찬데 내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도 함께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피눈물 나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히브리서 10장 34절을 다시 읽어보면, 이 짧은 한 문장이 얼마나 장엄하고도 극심한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 터져 나온 위대한 고백인지 깨닫게 됩니다.


특히 히브리서 10장 34절의 말씀은, 흡사 마태복음 5장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절절한 시대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자료에 따르면, 당시 유대 슬롯에서 '속옷'은 얇고 값싼 튜닉이었지만, '겉옷'은 일교차가 큰 사막 기후에서 밤에 이불로도 써야 하는 절대적인 생존 필수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겉옷은 율법으로도 압류를 금지한(출애굽기 22:26) 최후의 법적 권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고발해서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내가 법적으로 당당히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권리인 겉옷마저 기꺼이 내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나의 재산(권리)'을 잃어버리는 억울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영적인 원리로 깊이 들어가면 그 뿌리는 같습니다. 바로 성도들의 정체성이 '이 땅의 소유'에 묶여 있지 않다는 위대한 선언인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가진 것(소유)'이 곧 '나 자신(존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직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며, 우월감과 열등감, 무한 경쟁과 시기, 질투 속에서 평생 영혼을 갉아먹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재물이나 법적 권리가 내 인생을 궁극적으로 바카라임져 주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달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마주하는 극심한 손해와 고통, 억울한 일들조차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 이유를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변증합니다. 이 땅의 속옷, 겉옷, 집, 통장 잔고는 언제든 사라지고 결국엔 좀먹고 낡아질 '임시 소유물'에 불과합니다.


내 손에 있는 1,000,000원을 누군가 억지로 빼앗아 간다면 당연히 화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내 하늘 금고에 도둑이 결코 훔쳐 갈 수 없는 1,000억 원의 빛나는 황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깟 1,000,000원 손해 본다 해도 넉넉하고 호탕하게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하나님 나라)이라는 썩지 않는 진짜 재산을 소유한 자만이, 이 땅의 것을 억울해하지 않고 기꺼이 흘려보낼 수 있는 '영적인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저는 월말 5월 카드 대금, 대출 원리금, 여러 공과금을 다 결제하느라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몸이 아파 일을 쉬고 있는 넷째 언니와 그 아들 조카 진국이의 생활비 보조, 거기에 아직도 다 못 갚은 두 모자의 캐피탈 빚 원리금 월 200만 원까지. 당분간 고정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돈만 월 500만 원이라는 사실을 최근 새삼스레 계산해 보고는 내심 손이 후들거렸습니다.


'내가 미쳤나...'


시쳇말로 '현타'가 오려 했습니다. 허나, 눈앞의 얄팍한 손익 계산을 넘어 이 모자는 내가 아니면 당장 벼랑 끝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황임을 되새겼습니다. 주기적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마음으로 '제가 지금 이거 잘하고 있는 거 맞나요?'라며 거듭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조카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빚을 거의 다 갚아 독촉이 잦아들자 이젠 일반 기업 근무가 가능할 것이라 스스로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조카는, 나에게 미안해서라도 남은 빚을 빨리 갚으려고 대기업과 중견 회사 지방 근무지에 이력서를 수없이 냈고, 현재 무려 7군데나 서류전형에 합격했고, 몇 군데는 면접만 보면 바로 출근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조카가 집안 형편 때문에 특성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긴 했지만, 거기선 거의 전교 10등 안에 들만큼 성실했고 그 덕분에 고3때 수도권 대학에도 3군데나 합격했던 훌륭한 아이였습니다.


4월과 5월, 조카네를 도와준 돈만 2,000만 원이 넘어갔고, 인간인지라 깊은 회의감이 주기적으로 밀려오려던 찰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조카의 영육이 다시 살아나는 회복의 과정을 통해 제게 벅찬 위로를 안겨주셨습니다. 조카가 이력서를 낸 회사 중에는 대기업 L사도 있었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어렵다는 말에 호구처럼 이리저리 돈을 내어주며 손해만 본다고 혀를 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또 씹어 삼킬수록,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뜻'은 그 본질이 늘 한결같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 볼까 두려워 벌벌 떠는 세상,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고 손에 쥔 것을 악착같이 움켜쥐며 시기와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길 원합니다.


그 대신, 이 땅에서 당당히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좇아 살며 천국의 황금률을 현재의 삶 속에서 누리는 '행복한 예수님의 제자'로 날마다 나아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