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속 8km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로 돈 벌면서 내 사업하기

by김지연

독일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국에 돌아온 뒤 석 달 남짓 지났다.


나는 꿈꿔왔던 자전거 의류 브랜드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안 돈을 많이 써서 자본이 부족했으므로 처음 몇 개월간은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공고를 찾아 있는 대로 지원했다. 사업계획서를 쓰고 발표를 반복했다. 그러다 가능성을 봐준 곳에서 사무실을 지원받았다. 거기에서 여행기 영상을 만들어 올리고, 또 다른 지원 공고를 찾고, 브랜딩 자료를 만들고, 또 발표를 하고, 그렇게 브랜드를 조금씩 다듬어 나갔다.


그런데 지원금을 위한 발표들에 힘을 쏟느라 정작 제품을 개발할 시간이 없었다. 공들여 지원한 모든 사업들에 선정되지 못했다. 그렇게 퇴사를 한 지 2년이 되어갈 때쯤, 생활비가 점점 떨어져 갔다.


브랜드 준비는 지속하고 싶었고 돈은 필요했기에 주기적이되 매일 짧은 시간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야쿠르트 아줌마를 하게 됐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아니고 아침에 일찍 시작해서 점심 전까지 하는 일이라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생기고 좋다고 생각했다. 매일 똑같은 사람들에게 야쿠르트를 돌리는 일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6월에 시작해서 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설 때쯤 야쿠르트 배달은 생각보다 힘들어졌다. 최고시속 8km/h 짜리 카트를 타고 땡볕에 배달하려니 땀이 쏟아졌다가 배달지인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 마르기를 반복했고 매일 배달 가는 구역 중 하나였던 지하철 차량기지로 가는 기찻길을 지나갈 때면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뜨거웠다. 열사병 증상이 나타나서 가는 길에 폭염 대피소로 들어가거나, 냉장카트에 넣어둔 젖은 물수건을 꺼내 머리 위에 올려놓아도 속이 메스꺼워서 야쿠르트 지점에 도착하면 항상 냉장창고에 들어가서 10분씩 쉬다 나오곤 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해서인지, 젊은 사람이 하는 모습이 어그로가 끌렸던 건지, 보통은 신규 고객이 한 달에 한두 명 생기면 많이 생기는 편이라는데 내가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열다섯 명의 신규 고객이 생겼다.


그런데 정작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초반에 아무도 나에게 수금을 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은 채로 마감이 되는 바람에 첫 달부터 수익이 조금 꼬였는데, 시급으로 치면 최저시급의 반절도 못 받고 있었고 막판엔 월세도 못 낼 정도였다.


본가에 가서 가족들이랑 밥 먹고 티비 앞에 앉아서 과일을 먹던 때였던가, 중복이라고 OCN에서 극한직업을 틀어줬다. 마약반 형사들이 마약 카르텔을 잡겠다고 조직원들 아지트 밑에 치킨집을 인수했다가 갑자기 치킨집이 너무 잘돼서 다 같이 눈코뜰 새 없이 치킨만 계속 튀기는 중이었다.


이동휘가 소리쳤다.

“왜 자꾸 장사가 잘 되는데!!”


결국 치킨을 불티나게 팔다가 그 골목이 핫플이 되는 바람에 정작 마약카르텔은 이사를 가고 반장의 퇴직금을 쏟아부어 인수한 치킨집은 먹거리 x파일 방송 여파로 갑자기 손님들 발걸음이 뚝 끊긴다.


근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게 마치 내 모습 같아서...


브랜드를 위해 계속 강의도 듣고, 준비도 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자료를 만들어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하고, 사업계획서를 써서 컨설턴트와 상담도 했다.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은 자전거 의류와 일상의류의 경계를 허무는 브랜드이고, 브랜드를 구현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지속가능한 방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에 꼭 큰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물었다.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할 거 같은데 투자한 만큼의 메리트가 있을까요? 사람들은 지속가능한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많이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맞다고 대답하면서 졸업 작품을 만들던 6년 전을 떠올렸다.


나는 패션산업-특히 패스트 패션이 해양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항하는 주제를 내 졸전의 주제로 삼았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폐기물을 늘리는 데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졸업작품만큼은 생분해되는 대안소재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소재를 시도했다.


해외 논문들을 참고해서 콤부차를 발효할 때 나오는 스코비 버섯을 말려서 가죽을 만들어보려고도 해 보고, 알긴산 칼슘으로 바이오플라스틱을 만들었다. 활성탄이랑 해바라기 씨 껍데기를 갈아서 풀에 개어서 말려서 얇은 필름을 만들어 볼 시도도 해봤다. 전부 지랄맞게 갈라지거나 오색찬란한 곰팡이가 피어버리는 바람에 폐기처리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째 허탕을 치는 걸 본 교수님은 이제 제발 그만하고 동대문에 가서 소재를 떼어오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계속 자연소재를 고집하니까 다른 동기가 찾아온 네오프렌 소재를 같이 쓰라고까지 했다. 현실적이지 못한 나는 섭섭했다. 왜 새로운 소재를 만드는 데 도움은 안 주시고 플라스틱 소재를 써서 모양이나 구현하라고 하실까? 결국 막판에 알긴산 필름과 다시마로 소재를 확정하고 대나무 살과 인공눈물 공병을 모아 옷의 모든 재료를 재사용 플라스틱 외에는 전부 생분해가 되는 소재로 만들었다. 지금은 주어진 시간 안에 내가 새로운 소재를 구현하는 것이 상당히 비현실적인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때의 외로움이 다시금 떠올랐다.


'6년 전이랑 똑같구나'


나는 지독하게 공부해서 지속가능 패션의 필요성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구현하는 방법을 아는 전문가가 되어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졸업작품을 만들면서 외롭게 찾아 읽었던 해외 논문들, 그 때 혼자 읽던 논문을 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석사 유학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야쿠르트 마지막날이었다. 점장은 내가 퇴사하는 걸 사실대로 보고하면 자기 실적에 안 좋다며 어떻게든 퇴사를 감추려고 했다. 아프지도 않은데 어디라도 아프면 좋겠다며 가짜 병원 진단서를 요구한 그는, 퇴사자 마지막 식사에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다른 아줌마가 넌 왜 안 갔어? 하며 물었을 때 그때서야 알았다. 몰랐는데 어떻게 가겠어요. 아무튼 나를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이랑 식사하는 건 나도 피차 불편했기에 괜찮다고 했다.


"그럼 나랑 밥 먹을래?"

나의 전임자였던 아줌마가 물었다.


처음 입소한 날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던 나의 아줌마. 인수인계할 때도 나를 데려가지 않고 혼자 카트를 타고 멀찍이 가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탄 카트의 최고속력은 일괄적으로 8km/h로 맞춰져 있었다. 등속으로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거리로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배달하는 곳으로 향했다. 20m 정도 뒤에서 바라보는 145cm 남짓 되는 아줌마의 뒷모습은 귀엽기만 했다.


아무래도 돈줄이 줄어들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서 매일 보던 사람들과 이별하게 되는 서운한 마음도 들 것 같아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그래서 첫날 아줌마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는 상관없었다. 인수인계를 받는 일주일 동안은 최대한 아줌마를 돕기로 마음먹고 계단을 오를 때, 제품을 담을 때 아줌마 대신 내가 가방을 들고 스몰토크를 걸고 가르쳐주는 내용이 있으면 최대한 기억하려고 전부 받아 적었다.


아줌마는 금방 마음이 열려서 둘째 날 셋째 날이 될수록 내가 걸어오는 스몰토크에 더 즐겁게 반응하고, 옛날이야기도 해주고, 중간중간 힘들 때 마시자며 제일 비싼 야쿠르트를 꺼내서 나눠마시기도 하고, 넌 왠지 똑똑한 사람인 것 같다며 투박한 칭찬을 건네기도 했다.


우리는 지점 근처의 국밥집으로 향했다. 백 원 이백 원도 철저히 기록하는 아줌마가 오늘 나에게 밥을 사준다고 했다. 밥을 먹는데 아줌마가 밥은 안 떠먹고 콩자반만 뒤적였다.


밥을 먹고 나와서 카트 없이 둘이 조금 걸었다. 지점으로 아줌마를 데려다 드리고 헤어질 때였다.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보자."

아줌마가 훌쩍이며 짧은 팔을 벌렸다. 아줌마의 눈시울은 붉어져있었다.


"아이, 왜 울고 그러세요!"

"너무 고생만 하고 가는 거 같아서"

안은 자세로 서로를 토닥이며 한참을 머물렀다. 처음에 20m였던 우리 사이 거리가 서로의 품으로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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