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그래도 희망에 걸 수 있겠는가?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희망을 전복시키며 되묻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by민용준

<곡성> 이후 10년 만에 발표한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호프>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가상의 항구 도시 호포에서 일어나는 믿기 힘든 사건을 그린다.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이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차량 뒤편에서 운전석 방향을 비춘 카메라 너머에 잡힌 두 남자는 딱히 별말이 없다. 이윽고 다다른 목적지에는 각기 다른 소총을 어깨에 맨 사내 넷이 기다리고 있다. 사내 넷이 기다린 건 방금까지 운전석에 앉아있던 경찰 범석(황정민)과 그들을 이끄는 포수 성기(조인성)였고, 그 둘은 비로소 당도한 그곳에서 논 사이 보행로 한복판에 쓰러진 육중한 사체와 멀찍이 맞닥뜨린다. 온몸에 거대한 생채기를 남긴 채 도륙당한 소의 사체가 무엇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는지 몰라도 필경 예삿놈은 아닌 것 같다.


험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호랑이일지도 모른다는 포수들이 숲으로 향하고, 홀로 마을로 내리 달려온 범석은 터무니없이 뻥 뚫린 건물을 보며 기함을 토한 뒤 그 앞에 차를 세우고 수색에 나선다. 건물 외벽부터 찢기듯 부서진 잔해들이 어지러운 내부 한편에는 이미 숨을 거둔 채 쓰러진 시신도 있다. 마을 전체가 아수라장이며 난리통이다. 어금니를 꽉 깨문 범석의 눈에서 분노가 일렁인다. 하지만 곧 아직 형체를 보지 못한 놈과 대항하는 마을 사람들이 멀리서 하나둘씩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동차를 장난감처럼 내던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호랑이 따위는 아닌 것만 같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적을 좇아 마을을 뱅뱅 돌던 범석 앞에 비로소 그 실체가 슬며시 드러나고 범석은 소스라치며 뒤로 나자빠진다. 예삿놈을 넘어 듣도 보도 못한 놈이었다.

그야말로 단도직입적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이어지는 한 시간 가량의 러닝타임이 흐르는 동안,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벌어질 것인지, 한치도 예감할 수 없게 감상의 멱을 잡고 서서히 끌고 가더니 이내 거칠게 달음박치듯 내달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나 버렸다는 예감이 끝내 명백한 현실로 드러날 무렵부터 긴장감이 삽시간에 날카롭고 무겁게 진화한다. 그 순간부터 가능한 건 그저 답이 있을 리 만무한 물음을 내뱉는 스크린 너머의 인물들의 감정과 격하게 동화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무릎반사처럼 튀어 오르듯 발음되는 이 물음은 정말 몰라서 뱉는 것일 리 없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은 믿을 수밖에 없는 명백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감당할 수 없을 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듯, 입으로 피어오르듯 발음되는 것이다. 압도적인 무기력에 짓눌리기 직전에 본능적으로 내뱉는 신음이나 비명처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밀어내는 반사신경처럼.


이처럼 <호프>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1시간 가까이 독창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롤러코스터처럼 거칠고 세차게 감상을 쥐고 흔들며 자기 페이스대로 끌고 간다. 얼마나 험한 것이 튀어나왔는지 알 길이 없음에도 그것이 지나간 흔적들이 죄다 초토화된 사태를 보고 공포와 분노 사이를 오가는 진자처럼 흔들리는 인물의 감정에 온전히 몰입하며 함께 거듭 미끄러지고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감정을 자아내고 야기하는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도, 혹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되레 보다 효과적으로 감정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밀어붙이듯 구상하고 연출한 모든 장면들이 확실하게 감상을 압도한다. 단순히 무시무시하게 짓누르는 것을 넘어 중간중간 뜬금포 같은 유머를 캐릭터들의 일상 언어로 구사하는 방식도 흥미롭게 감상을 유린한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 웃어도 되는 것일까, 불경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기이하게 사람을 홀리듯 웃긴다.

이렇듯 극의 전반부는 분명 <호프>를 인상적인 체험으로 여기도록 만들 가공할 롤러코스터다. 후반부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나아간다. 범석과 달리 성기가 이끄는 포수들은 숲으로 나아가고 그곳에서 본체를 맞닥뜨리며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추격과 도주라는, 전반부와 비슷한 양상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기질은 판이하다. 전반부가 근본적인 정체를 차단한 미스터리로 서스펜스를 자욱하게 주입하며 감상을 압박하고 휘감아 끝내 일거에 폭발시키며 극적인 인상을 강화한다면 후반부는 일찍이 응축한 미스터리를 빠르고 산발적으로 폭발시키며 속도감과 타격감을 보다 물리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액션 시퀀스의 장으로 전환된다. 전반부가 서서히 밀고 나가며 분위기를 조성하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사이의 정보적 편차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면 후반부는 보다 세차고 빠른 움직임으로 직접 역동적인 기운을 추진하는 카메라와 함께 힘을 도모하는 인상이다.


다만 후반부에 다다라 펼쳐지는 추격과 도주 시퀀스는 그 역동적인 기운에 비해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져서 감상을 느슨하게 풀어버리는 감이 있다. 이를테면 말을 타고 내달리며 도주하는 성기의 속도감과 이를 뒤쫓는 외계인의 속도감이 종종 잘 맞물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보이는데 이는 말을 타고 내달리며 실제 액션을 감행한 배우의 촬영 장면과 퍼포먼스 캡처 슈트를 착용하고 동작을 연기한 배우의 촬영 소스에 CG를 입혀 구현한 결과물의 리듬감이 연출과 편집 면에서 정밀하게 조율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그만큼 해당 장면이 지나치게 길거나 단조롭다고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배우가 직접 말을 타고 초원과 아스팔트 위로 줄기차게 내달리는 장면이 그 속도감을 안배하면서도 다양한 풍광으로 포착하는 카메라의 속도감으로 이입될 때 고전적인 시네마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해당 장면에 대한 감상의 호불호와 무관하게 <호프>라는 영화가 거둔 독자적인 성취로서 인정할만하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호연과 열연 그리고 수두룩한 발견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면에서 <호프>는 분명 즐길만한 영화다. 주연을 맡은 세 배우의 호연과 열연은 물론이고 <호프>에서 숨겨진 주연이라 해도 좋을 배우 이상희는 대사를 할 때마다 얼빠지게 자지러지게 만들며 거듭 그의 출연을 기대하게 만든다. 동시에 짧은 분량임에도 장악력이 대단한 화술로 영화의 공기를 뒤집어버리는 임현식의 ‘똥썰’은 그 자체로 탁월한 방점이다. 그저 듣고 있을 뿐인데 무언가 함께 맡고 있는 듯 코 밑에서 올라오는 긴장감이 솔찬하다. 기괴하게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찐득하게 만드는 황석정과 괴상하게 생겨먹은 덕후 근성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음흉하게 뒤트는 음문석까지, 캐릭터 면면이 하나하나 뚜렷하고 귀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호프>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SF영화다. 하지만 <호프>의 외계 생명체는 인간과 대화를 나누거나 지적 교류를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몰라도 인간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들도 딱히 애써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에 비해 크고 단단한 체구와 골격을 활용한 공세가 무자비하다. 대단한 수준을 넘어 자비가 없다. 실상 그들 역시 인간을 대화의 상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이 대결 양상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협의의 여지가 없는 타종 간 생존 투쟁에 가깝다.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므로 소통이 불가한 탓이기도 하지만 이해해 볼 가능성을 모색하기 전에 살생으로 먼저 관계를 맺어버린 운명적 인과이기도 하다. <호프>는 이렇듯 두 문명의 충돌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다. 결국 여기에는 인위적인,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휴머니즘이라고 곧잘 발음하는 ‘희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은 <호프>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호프’란 말인가.


호포항 마을에서 처참한 참상을 목도하며 실체를 추적한 끝에 정체불명의 괴이한 존재와 마주하게 된 범석이 생사를 고비에 서서 가까스로 도주하다 구원자처럼 등장한 성애(정호연)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며 도주에서 추격으로 방향을 바꾸는 순간 전복적인 쾌감이 상승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영화의 내면적인 물음이 언뜻 드러난다. 괴존재를 향한 예상 밖의 감정이 노출되고 객석으로 전이되는 순간, 영화는 예상 경로와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선악의 대립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화되는 전형적인 대결 구도를 선명하게 활용하는 크리처 무비 같은 장르영화의 인상으로 돌진하던 <호프>가 그러한 장르적 쾌감이 고조되는 순간, 기실 다른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전시하듯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이한 물음을 낳는다. 복수심이 그득했던 범석의 눈에서 의아한 연민이 떠오르는 순간, 그전까지 예상했던 경로를 이탈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 읽힌다.


<호프>의 시대 배경은 ‘반공’에 대한 정서적 합의가 그득한 1970년대쯤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대성은 역사적 현실을 반영했지만 주무대가 되는 항구도시 호포는 존재하지 않는 땅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외계인이 출몰한다. 이렇듯 <호프>는 사실적인 배경과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배경이 충돌하고 뒤엉키는 영화다. 이는 현실적인 디테일이 반영될수록 허구의 몰입도는 보다 높아진다는 작법의 원칙이 반영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중력 같은 믿음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에’라는 한탄과 탄식만이 가당한 재앙 앞에서 실체를 봤다고 하는 이들의 증언은 대체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왜냐면 제대로 듣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제대로 말하는 사람도 드물다. 뭔가 실체에 관해 말하고자 하면 자꾸 말이 끊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난무하다.

그래서 정말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국 이 모든 사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건처럼 보여서 측은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건 결국 그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럴만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납득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뭣이 중헌 것인지도 잘 모르고 그저 미끼를 물어버리듯 사투를 벌이다 끝내 험한 것이 나와버리는 순간 ‘불가해’ 자체가 재앙이 되는 상황과 풍경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면 이 모든 아이러니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각자 바라보는 방향으로 내달리는 개별적인 희망이 끝내 엇갈리고 충돌하는 파국의 증거로서 명백해질 때, 그 이후에도 희망이란 유효할 수 있을까? 그 파국이 감당할 수 없도록 거대하고 버거울 때에도 희망이 가당한 운명이라 믿고 그에 기댈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이 모든 난리가 한차례 정리되는 동시에 인간도, 외계인도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재앙이 전시되는 결말부에서 상황을 주도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이다. 그전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던 음성만 들려질 뿐 그 의미를 독해해주지 않던 영화는 비로소 그들의 언어에 자막을 달아준다. 하지만 그래서 영화는 더욱 거창하게 모호해진다. 자기 종족 안에서 고귀한 혈통의 일원으로 보이는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전사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가 보이는 희생의 의지에 이렇게 화답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들은 그 증거가 아니다. 운명을 바꿔라.”


이 대사가 흥미로운 건 <호프>가 어떤 실체에 관해 사유하고 그 정체를 규명하는데 힘을 쏟는 이성적인 기질보다 그저 서로 다른 실체가 맞닥뜨렸기에 필연적으로 충돌하며 각자 생존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본능적인 기질을 그리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이성은 영화의 끝에서 발휘된다. 그런 면에서 <호프>는 서로 다른 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폭력과 충돌의 역사를 먼저 전시하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이성적인 자각을 순차적으로 그리는 영화 같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호프>는 나홍진이라는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 보다 뚜렷하게 반영된 영화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필모그래피이기도 하다. 대체로 모호하고 의뭉스럽게 여겨질 그 결말이 되레 그의 전작들을 이해하는 명백한 가이드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을 그리는 것이 허구의 자유라면 현실에서 우리가 마땅히 믿어야 한다고 여기던 가치가 뒤틀리는 상황을 그려내는 것도 허구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프>는 우리가 믿고자 하는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대재앙의 풍경 앞에서도 그것이 유효하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기이한 체험처럼 보인다. 희망을 믿는다고 하여 희망이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거듭 물어야만 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을 묻지 않아도 희망할 수 있을까? 그리고 희망을 믿을 수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진 것일까? 그런 면에서 <호프>는 전복적인 결말을 쾌감이 아닌 허무로 맺는, 도전적인 영화다. 이 도전은 분명 적잖은 반발을 살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사례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작이란 끝내 새로운 가능성을 거듭 두들기고, 불가항력과 부딪혀야만 하는 일이므로. <호프>의 그 마지막 대사처럼. ‘운명을 바꿔라.’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발간하는 'The-K 카지노 게임' 2026년 8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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