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가장 멀리 돌아보고 나아가는 영화다.
전작 <오펜하이머>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오스카 주요 부문을 휩쓸며 흥행성과 예술성을 함께 인정받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야심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결과물이다. 172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모두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하며 얻은 필름롤의 길이만 600km가 넘는 동시에 육중한 아이맥스 카메라를 동원한 촬영 현장에서도 CG 활용을 최소화하고 물리적인 VFX 효과를 극대화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고집스러운 연출 방식이 반영된, 고전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지향으로 확장되고 확대된 시네마다. 무엇보다도 근현대와 미래 시제 배경의 영화를 만들어온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류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먼 과거의 서사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영화화했다는 사실이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다다른 가장 먼 시간이기도 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10년간 지난하게 이어지던 트로이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왕국 이타카로 돌아오기까지 거쳐야 했던 10년간의 험난하고 기이한 모험과 가까스로 성사된 그 귀환 이후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날 트로이 목마로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에 관한 내용은 총 24권으로 구성된 <오디세이아>의 8권에서 짧게 언급된다. 이타카로 향하는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여정지 파이아키아의 음유시인 데모도코스는 오디세우스의 청을 받아 트로이 목마를 활용하는 계바카라으로 승전을 이끈 오디세우스에 관해 낭송한다. <오디세이>에서 이 대목은 삭제됐지만 트로이 전쟁에 관한 묘사는 오디세우스의 심연을 통해 재현되는 플래시백 방식을 동원해 보다 직접적으로 재생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디세이>를 <오디세이아>와는 다른 출발선에 둔다. 트로이 전쟁과 관련한 시를 읊는 이타카의 음유시인(트래비스 스캇)으로부터 시작된 <오디세이>에서는 곧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가 출현하고 이를 승전의 전리품으로 여기며 성 안으로 들어가는 트로이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극 후반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시점으로 재현되는 트로이 전쟁에 관한 회상 신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오디세이>에서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형성하는 동시에 영화의 주요한 감정선을 장악하고 있는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심리와 깊게 연관된 핵심 사건으로 제시된다.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와 다르다.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에 관한 계바카라을 내고 전황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지만 그런 업적에 어울리지 않게 억울한 고행을 겪으며 나름대로 한층 성장한 뒤 끝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인물로 보인다. 선택된 주인공을 위해 마련된 영웅의 성장담에 가깝다. 올림포스 신들이 개입하고 인과를 좌우하는 신화의 세계에서 선택받은 영웅은 끝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지위를 복권한다. 하지만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나아가고 다다르는 자가 아니라 돌아보고 벗어나려는 자에 가깝다.
“미케네 시대의 고고학적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 시대의 역사라고 여겨지는 많은 지식들은 정보에 기반한 지적인 추측일 뿐이다.” 오늘날 호메로스를 원작자로 지목하는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당대 현실을 짚어볼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도 꼽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입장에서는 역사적 기록이 아니므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메로스의 방식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비슷한 관점으로 다른 곳을 바라볼 뿐이다.
"핵심은 호머가 묘사하는 사건들과 그의 이야기가 기록되거나 대중에게 처음 전달된 시점 사이에 존재하는 약 400년의 시차다. <오디세이>를 각색하며 이런 면에서 흥미를 느꼈다. 호머는 수백 년 전, 당시 대중이 자신들의 시대보다 더 발전했다고 여겼던 시대를 배경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문명이 번성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40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오디세이>는 호머가 이야기를 전개한 배경과 상반되는 결과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원전 8세기에 구전된 것으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전후 배경이 되는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13세기경에 일어난 사건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말한 ‘400년의 시차’는 이를 의미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트로이 전쟁 이후로 400년이 지나서 노래된 이유를 그로부터 번성했던 과거 문명을 향한 후대인의 향수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1세기까지 번성한 고대 그리스 문명으로 알려진 미케네 문명은 그 이후로 붕괴했다고 하는데 그 요인 중 하나를 바다 민족의 약탈이나 침공으로 보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없기에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의 붕괴 이후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거대한 돌벽을 본 후대 그리스인은 이를 <오디세이아>에도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들이 쌓아 올린 벽 같다고 하여 ‘키클롭스의 벽’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것을 인간이 쌓아 올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후퇴한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오디세우스의 시대란 신비롭고 두려운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원형으로 두되 작품이 만들어지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시대 배경까지 재해석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결과물로 보인다. 특히 ‘바다의 이방인’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문명이 무너질 날이 오고 있음을 예견하듯 말하는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자신들이 최고의 문명을 이룬 존재임을 자부하며 이를 부정하는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대사는 이런 반영의 결과에 가깝다. 이는 <오디세이>를 <오디세이아>라는 구전 서사시의 영상화를 넘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까지 아우르는 탐구적 기질을 지닌 작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오디세이>는 원전의 배경이 되는 미케네 문명이나 그 이후에 도래할 그리스인들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다. <오디세이>가 거듭 경고하듯 가리키는 문명의 붕괴에 대한 예견은 <오디세이>를 목도할 관객들의 시대, 그러니까 <오디세이>가 찾아온 현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오디세이>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신의 존재감을 대부분 소거해 버린다. <오디세이아>에서 끊임없이 오디세우스의 여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올림포스의 영향력은 <오디세이>와 무관한 힘이다. 유일하게 등장하는 아테나(젠데이아)는 원작과 달리 오디세우스의 수호신다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저 그의 곁을 떠도는 정념 혹은 유령에 가깝다. 오디세우스의 행보를 가리키고 지휘하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의 여정을 무력하게 바라보다 숙이는 고개가 보다 또렷한 존재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아테나가 이리도 무력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확실해진다. <오디세이>가 신의 영향력을 지운 건 단순히 <오디세이아>의 신화적 세계관에서 탈피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을 자주 언급한다. ‘크세니아(Xenia)’라고 하는 이 고대 그리스 법도는 자신을 찾아온 그 누구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가능한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는 슬롯적 불문율이다. 이는 전지적 존재에 대한 공포가 기저에 깔린 법도이기도 했다. 걸인으로 변장한 신을 박복하게 대했다가 끝내 화를 입었다는 설화의 지배력이 당대의 사람들의 믿음과 행위에 기반한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타인을 위한 선행이기도 하지만 미리 예견된 불행을 피하고 자신과 서로를 보호하는 지혜로 인정된 셈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이란 문명의 질서를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절대적인 법도이자 권력의 근간을 받드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신의 법도를 존중해야 한다는 믿음은 그러한 신의 가호를 받는다고 여겨지는 권력의 기반이 된다. 이러한 시대에서 신의 유무나 기도의 효용에 반문한다는 건 곧 문명의 질서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불신을 묻는 것과 같았다. 신에 대한 불신은 곧 슬롯적 질서를 흔드는 불안한 징후와 다름없는 것이다.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이 통하지 않는 이들을 접하고 그때마다 곤혹스러운 일을 겪는다. 특히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나 무자비한 거인족 라이스트뤼고네스는 오디세우스가 기대했던 제우스의 법을 무참히 짓밟아 곤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듯 자신들의 법도가 통하지 않는, 신실한 성벽 같았던 문명 밖에서 무력함과 잔혹함을 잔뜩 체감하는 오디세우스는 깨닫게 된다. 제우스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이들에게 제우스의 법이란 효력이 정지된 부도수표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오디세우스 자신도 이미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품고 있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겨우 탈출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눈을 멀게 된 외눈박이 거인이 포세이돈의 아들 폴리페무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신의 진노를 걱정한다. 이러한 반응 앞에서 오디세우스는 말한다. ‘신의 비위만 맞추며 살 수는 없어.’ 불경한 의심과 불안한 징후는 이미 오디세우스 안에서 이미 자라나고 있다.
<오디세이>에서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노래는 네가 가장 원하는 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더군. 그리고 네가 가장 가질 수 없는 건 네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라고.’ <오디세이>에서 불타고 무너지는 트로이의 아비규환 속에 자리한 오디세우스는 승리를 이끈 장수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자신들의 승리를 만끽하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는 아카이아인들과 달리 홀로 헤매고 신음한다. 트로이 성벽이 열린 뒤 그에게 찾아온 건 승전의 환희가 아니라 종말의 비극이다. 환대의 힘이 약해지고, 그렇게 문명을 지탱한 약속이 느슨해진 시대의 징후가 뜨겁고 날카롭게 구체화된 트로이의 불길과 비명 사이에서 그 세계의 질서를 보증하고 권유하던 신의 목도 떨어진다. 그 모든 광경을 목도하는 오디세우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신의 계바카라으로 승리를 이끈 땅에서 되레 한때 갖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과 함께 올 끔찍한 미래를 목도한다.
이렇듯 <오디세이아>와 달리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남다른 심정을 품고 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로 무너뜨린 건 트로이 성벽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트로이를 떠난 오디세우스가 마주하는 험한 존재들과 그가 전전하는 험난한 여정은 일찍이 성공시킨 자신의 계바카라으로 드러난 문명의 균열과 그 징후를 일찍 실감하게 만드는, 다가올 실패를 미리 예습하는 과정에 가깝다. 절대적 금언이라 믿었던 제우스의 법이 무력한 세계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유일하게 내다본다. 결국 <오디세이>가 그리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신비로운 모험담이 아니라 이미 예언된 붕괴의 전조를 미리 찾아가는, 영웅의 귀환을 지연하는 시간이 아니라 문명의 파괴를 미리 내다보게 된 이의 성찰을 강화하는 증강현실처럼 보인다.
이렇듯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고전적인 로드무비가 아니라 그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관점으로 제시한다. 미케네 문명의 황금기를 배경에 둔 호메로스의 노래를 문명의 황혼기이자 암흑기의 전조로 재해석한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왜 이런 영화를 만든 걸까? 3000년 전에 만들어진 고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디세이>를 마주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자리하고 있는 현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오늘은 어떤 날일까? 우리는 문명의 황금기를 지나는 존재일까, 혹은 황혼기를 지나는 존재일까? 현대를 지탱하는 질서와 법도는 무엇이며 그것들은 제대로 유지되거나 작동하고 있을까? <오디세이>는 3000년 전의 고전에서 이토록 현대적인 물음을 추출해 낸다.
<오디세이>에 앞서 완성한 <오펜하이머>는 고전적인 믿음이 전복된 세계를 그리는 영화였다. 원리를 규명할 수 없어도 명확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을 과학이라 규정하고 활용해도 무방하다는 믿음이 가당해진 양자역학의 시대는 고도화된 문명의 혁신과 풍요를 이끌어냈지만 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 또한 인류의 손에 쥐어줬다. <오펜하이머>가 발전과 파괴를 함께 쥐고자 하는, 양가적인 욕망의 모순이 공존할 수 있는 오늘날로 들어선 인류의 아이러니를 강렬한 진동처럼 들려주는 영화였다면 <오디세이>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작금의 세계가 이루었거나 이루었다고 믿어지는 성취가 삽시간에 허무해지는 풍경을 상상하게 만드는 딜레마의 영화다.
동시대 인류는 대단한 발전을 이룬 현대에 이르렀기에 지독한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역설에 시달리고 있다. 삶의 편의가 최고조에 이른 기술의 발달은 되레 현대인을 우울의 늪으로 끌어당긴다. AI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기후 위기의 그림자는 짙어지고, 세계 정세의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도 제기되는 동시대에서 인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3000년 이후의 인류에게 희대의 미스터리가 될 문명의 황혼기에 서있는 건 아닐까? <오디세이>는 이처럼 미지의 물음에 봉착하고 있을지도 모를 현대 인류에게 잠재된 물음을 추출한 뒤 이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허구라는 바구니에 담아 제안하는 물음의 영화처럼 보인다. 우리의 문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런 면에서 <오디세이>는 미래에 대한 비관이 드리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영화는 희망의 여운을 놓지 않는다. <오디세이>의 결말은 언뜻 <인셉션>과 비슷한 인상으로 다가오는데, 그것이 관객의 선택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뉘는 길처럼 보이는 탓이다. 최종장에서 그려지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항해는 그에 앞선 장면에서 절명할 것 같은 오디세우스의 이후 상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어나지 않은 사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영화가 그린 마지막 상황을 일어나지 않은 상상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끝내 오디세우스가 바라던 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디세이>의 결말을 이뤄지지 않은 꿈이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뤄진 현실이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어느 쪽이라 해도 낭만적이지만 끝내 어둡다. 그리고 이것은 문명의 종말을 막아낸 미래도 아니고, 막을 수 있는 계바카라도 아니기에 전자는 이미 죽음으로 종착한 환상이며 후자는 결국 멸망을 등진 모험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인다 한들 애수가 깃든다.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뱃전에서 오디세우스가 결국 노래로만 남게 될 자신들의 문명에 관한 운명을 내다볼 때 페넬로페는 그럼에도 새롭게 일어날 문명을 기약한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문명의 황혼을 등지고 나아가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태동을 기원한다. 그렇다면 <오디세이>는 현대 문명의 종말을 예언하는 노래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낙관하는 영화일까? 어쩌면 그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오디세이>는 또 한 번 찾아올 순환의 시대를 직시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황혼을 등지고 나아가서 마주하는 세계라 하여 희망적일 수는 없지만 그저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는 것을, 지금의 종말을 내다보는 것과 내일이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다. 운명에 관한 예언과 개척을 향한 선언이 한 자리에서 공명한다.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돌아갈 것은 돌아가며, 살아갈 이는 살아간다. 가려진 역사가 지워진 시간이 아니듯, 영원하지 않음이 곧 사라짐은 아니듯, 그렇게 무너지고 소실되고 풍화됐다 해도 끝내 남아 전해지고 불리우는 그 노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