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는 어떻게 세계 최고의 IP 제국이 됐을까

100주년을 맞이한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역사에 관하여.

by민용준

100여 년 전만 해도 디즈니는 한 가문을 대변하는 성씨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디즈니라는 고유명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디어 그룹이자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이름으로 떠오르는 거대한 성으로 그려진다. 월트 디즈니로부터 시작됐고, 미키 마우스가 쏘아 올린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시간은 한 사람의 인생과 업적을 넘어 한 세기를 지나온 기업과 한 시대를 이룬 문화의 역사로 변모하고 확장됐다. 시작은 물론 한 사람의 재능과 야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프랑스에서 1년여의 시간을 보낸 월트 디즈니는 1919년, 캔자스시티로 돌아왔다. 직업 전선에 뛰어든 평범한 10대 청년이었고,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상업 광고 삽화 작업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었다. 덕분에 깨달았다. 자신이 ‘광고 삽화가’가 아니라 ‘만화가’라는 정체성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상업적 기술이 아니라 창작적 예술로 통용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광고용 필름에 들어가는 만화를 그리는 일을 하며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본래 갈망했던 지역 신문사 만화가로 고용될 기회를 얻었지만 거절할 정도였다. 그때는 이미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든 뒤였다.


1922년 5월, 월트 디즈니는 캔자스시티에서 친구이자 동료였던 어브 아이웍스와 함께 ‘래프오그램 영화사(Laugh-O-Gram Films, inc.)’라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직원을 고용했고 신문 광고를 내걸었다. 하지만 당시 애니메이션은 수익성이 얕은 사업이었다. 장편영화 사이에 잠깐 틀어주는 부록처럼 여겨졌다. 그만큼 애니메이션 제작과 배급을 희망하는 투자자는 드물었다. 재정적 위기를 막고 창작적 동력을 살리고자 갖은 애를 썼지만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야심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첫 회사를 정리하며 알게 된 건 이제 캔자스시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뉴욕과 할리우드를 저울질하다 할리우드를 선택했다. 형 로이 디즈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할리우드는 영화 스튜디오가 즐비한 영화의 땅이었다. 그렇게 월트 디즈니는 수중에 남은 단돈 40달러를 들고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1923년이었다.


월트 디즈니가 캔자스시티에서 실패의 경험만 얻은 건 아니었다. 몇몇 작품을 기획했고, 그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둔 단편 시리즈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는 다양한 배급사의 문을 두드리도록 이끈 작품이었다. 그런데 캔자스시티에 있을 때에는 열리지 않던 기회가 할리우드에서는 열렸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시리즈의 배급 계약이 성사됐다. 이를 계기로 월트 디즈니는 할리우드에 당도한 그 해에 형 로이와 함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디즈니 브라더스’를 설립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26년에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이름을 변경했다. 월트 디즈니라는 이름이 기업가로서 확실히 부상되는 순간이었다.


1927년부터 1928년 사이 월트 디즈니는 씁쓸한 성공을 경험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제작을 마친 뒤 월트 디즈니는 토끼를 의인화한 캐릭터 ‘오스왈드’를 만들어낸다. 디즈니 최초의 마스코트 캐릭터였던 오스왈드는 디즈니의 것이 아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의뢰로 만들어진 터라 캐릭터 저작권을 행사할 권한이 없었다.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는 개그 요소만 부각되고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지적에 번번이 시달렸다. 심지어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를 구상하는 애니메이터가 드문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트 디즈니는 ‘오스왈드가 다른 존재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독자적인 퍼스널리티를 가진 고유한 존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었다.


오스왈드는 크게 성공했다. 문제는 역시 오스왈드의 주인이 디즈니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유니버설 스튜디오 측근인 제작자는 월트 디즈니가 고용한 애니메이터들에게 몰래 접근해 비밀 계약을 제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월트 디즈니에게 제시한 재계약 조건 중에서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를 인수해 월트 디즈니에게 추가 주급을 지불하겠다는 모욕적인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월트 디즈니는 분개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스왈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만 분명해졌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하고 싶은 게, 갖고 싶은 게 생겼다.

월트 디즈니와 미키 마우스

월트 디즈니는 캔자스시티 시절, 제도판 위에 앉아있는 생쥐를 스케치하다가 그것을 본 여직원의 비명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외에도 생쥐와 관련된 독특한 경험담을 말한 바 있는데 월트 디즈니의 아내 릴리언 디즈니를 비롯한 몇몇 주변인은 그것이 다 미키 마우스를 홍보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라 인정한 바 있다. 이렇듯 월트 디즈니가 생쥐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몰라도 중요한 건 그 관심이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청사진이 됐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미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다. 월트 디즈니는 원래 모티머라는 이름을 떠올렸지만 릴리언의 제안으로 미키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건 아니다. 확실한 건 미키가 보다 짧고 간결한 이름이었다는 것이었다. 오스왈드와 매우 유사한 생김새를 갖고 있지만 이는 월트 디즈니가 오스왈드를 탄생시킨 주체임을 드러내는 근거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미키 마우스는 이름 그대로 토끼가 아닌 생쥐였다.


미키 마우스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탁월한 자산이자 더할 나위 없는 마스코트가 된 건 1928년에 공개된 단편 <증기선 윌리>의 성공 덕분이었다. 선상에서 키를 돌려대고 엉덩이를 흔들며 휘파람을 부는 미키 마우스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증기선 윌리>는 최초로 음성 더빙을 가미한 유성 애니메이션이었다. 무엇보다도 인물의 동작을 음악과 1:1로 맞추듯 동기화한 ‘미키 마우징’은 혁신적인 엔터테인먼트였다. 이러한 방식에서 착안한 단편 시리즈 ‘실리 심포니’는 1939년까지 75편이 제작됐는데 그중 1932년에 공개된 단편 <꽃과 나무>는 테크니컬러 기술을 통해 구현한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이었으며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다. 이후로 월트 디즈니가 받게 될 32개의 오스카 트로피 중 첫 번째 것이었다.


1937년에 공개된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전례 없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서 디즈니의 명성은 보다 확고해졌다. 월트 디즈니의 지휘하에 만들어진 <피노키오>(1940), <환타지아>(1940), <덤보>(1941), <밤비>(1942)는 기술적 역량을 증명해 냈고, 동화를 모티브로 기획된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 팬>(1953)의 연속적인 대흥행은 스튜디오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월트 디즈니는 첫 실사영화 <메리 포핀스>(1964) 제작을 주도했고, 이 역시 대성공을 거두며 보다 크고 너른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월트 디즈니의 역량은 창작자의 영역을 넘어 사업가로서 보다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제작 과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 부에나 비스타 픽처스라는 독자적인 배급사를 설립해 직접적인 배급망까지 갖추는 것은 물론 성공적인 다방면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인기 있는 작품과 캐릭터를 바탕으로 음반, 완구, 도서, 공연, 방송 등 다양한 사업을 도모하는 IP 비즈니스 경험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1955년, LA에 개장한 디즈니랜드는 디즈니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 간접적인 환상을 육안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플랫폼 비즈니스로서 오늘날까지 디즈니가 이룬 명성에 기인하는 동시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하다. 디즈니에서 제작하고 배급하는 모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팅커벨이 날아오르는 신데렐라 성을 마주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의 랜드마크인 신데렐라 성을 떠올린다. ‘꿈과 환상의 나라’라는 슬로건과 메시지는 그렇게 스크린 안팎으로 공고해진다.


1957년 월트 디즈니가 직접 그렸다는 ‘디즈니 레시피’에 이 모든 비전이 집약돼 있다. 월트 디즈니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모든 비즈니스는 다른 분야의 비즈니스와 연결돼 있고, 독립적이거나 단일한 사업은 부재하다. 자사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흥행이 당장 부진해도 그로 인한 손해는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 안에서 만회된다. 그럼으로써 성공적인 콘텐츠의 매력을 단기적인 성과로 소진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지속적인 소비를 유도하고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월트 디즈니는 오늘날 수많은 기업들이 논하는 콘텐츠 생태계를 바탕에 둔 플랫폼 비즈니스를 일찍이 1950년대에 내다봤고 완성한 것이다. 이렇듯 월트 디즈니의 강력한 리더십과 비상한 선구안이 디즈니라는 마법을 운용하는 결정적 주문이었다. 문제는 누구나 영원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점이었다.

월트 디즈니가 그린 '디즈니 레시피'

1966년, 월트 디즈니는 세상을 떠났다. 1971년에는 그의 형 로이 디즈니마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디즈니의 상황도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월트 디즈니가 그린 큰 그림은 곳곳에서 희미해졌다. 1971년부터 1984년까지, 디즈니의 수익성은 극도로 악화됐다. 월트 디즈니 사후로 새로운 애니메이션은 개발되지 않았고, 콘텐츠 역량이 빛을 잃자 디즈니랜드의 신비도 급격히 낡아갔다.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나 리조트 사업인 월트 디즈니 월드에서 벌어들인 돈이 전사 수익의 70% 이상을 차지했고, 디즈니 스튜디오의 순수익은 25% 아래로 떨어졌다. 마법의 성에 마법이 없었다. 심지어 주식 매수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기업 사냥꾼마저 나타났다. 혁신이 시급했다. 위기를 타파할 혁신적인 리더가 필요했다. 확실한 건 디즈니 내부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수혈이 필요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CEO 출신의 마이클 아이스너가 바로 그 혁신의 적자로 지목됐다.


마이클 아이스너는 낡아가는 제국에 새로운 활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디즈니가 깨워본 적 없는 고객을 흔들어 보기로 했다. 디즈니에서는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전체관람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가족적인, 동화적인, 이런 류의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 작품은 디즈니의 것이 아니라는 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선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즈니가 쌓아온 역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인 관객을 만족시킬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방바카라을 찾았다. 디즈니의 자회사인 터치스톤 픽처스와 할리우드 픽처스를 설립한 건 그런 이유였다.


<비버리 힐의 낮과 밤>(1991)은 불륜을 소재로 한 R등급의 코미디 영화였다. 디즈니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았지만 터치스톤 픽처스에서 제작하고 부에나 비스타 픽처스에서 배급한, 디즈니에서 만든 최초의 17세 이상 관람가 영화였다. 마이클 아이스너는 성인 남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영화가 디즈니에 새로운 수익을 안겨줄 거라 판단했다. <굿모닝 베트남>(1986),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 <죽은 시인의 슬롯>(1989), <귀여운 여인>(1990) 등 작품으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고 성인 관객들의 감상 수준에 걸맞은 영화를 제작하거나 배급했다. 이런 행보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스튜디오로서 디즈니에 대한 인식을 재조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수익적으로도 유익했고, 새로운 사업 방향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유명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손을 잡고 기획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오락적 묘미를 제공하는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디즈니랜드라는 테마파크에 어울리는 기획으로서 디즈니 레시피를 강화하는 킬러 콘텐츠 노릇까지 해냈다.


마이클 아이스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라는 디즈니의 자부심 회복을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마이클 아이스너는 매년 한 편씩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결과 디즈니의 마법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 <라이온 킹>(1994)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레거시 콘텐츠이자 펀치 라인이 완성됐다. 동시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토이 스토리>(1995), <몬스터 주식회사>(2001) 제작에 투자하며 CG 애니메이션 시대 개척에도 동참했다. 1995년에는 100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 ABC 방송국을 인수하며 자회사 ESPN까지 확보했다. 기존에 불가능했던 스포츠 중계도 새로운 수익 사업에 추가된 것이다.

마이클 아이스너

강력한 콘텐츠 라인의 강화는 다양한 플랫폼 비즈니스 라인의 강화로 이어졌다. 그는 디즈니랜드의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고 시설을 확충하며 눈에 보이는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그렇게 확보한 디즈니의 부지 안에 수많은 호텔을 만들고, 테마파크도 확대했다. 플로리다에 MGM-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열고, 현재에는 파리 디즈니랜드라 불리는 유로디즈니를 프랑스 파리에 개장하는 등 전 세계적인 영토 확장에 나섰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 인기 있는 캐릭터를 전 세계 각지의 팬들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창구를 개설한 것이다. 콘텐츠 비즈니스와 플랫폼 비즈니스가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마이클 아이스너는 잘 알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가 설계한 디즈니 레시피가 21세기에도 유효한 비즈니스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2005년, 디즈니 이사진은 마이클 아이스너 대신 밥 아이거를 CEO로 추대했다. 마이클 아이스너의 이인자로 꼽히던 밥 아이거가 CEO 자리에 오른 건 마이클 아이스너가 당시 픽사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와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아이스너는 <토이 스토리 2>(1999)의 흥행 이후 속편 제작을 원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다른 걸 원했다. 2004년 1월,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는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며 디즈니와 계약 연장 협상을 중단할 것이 발표했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은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픽사의 CG 애니메이션은 미래였다. CG 애니메이션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손쉽게 낡은 것이 돼버렸다. 이미 디즈니의 영화 제작 운영비의 45%가량이 픽사 작품의 배급으로 얻은 수익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셀 애니메이션 제작은 중단됐고 CG 애니메이션 제작 노하우는 없었다. 훌륭한 기술도, 스토리도 없었다. 디즈니랜드에서도 픽사 캐릭터가 디즈니 캐릭터의 인기를 압도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마이클 아이스너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디즈니 이사진도 마이클 아이스너 대신 스티브 잡스와 원만한 대화를 이어갈 인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선언은 중요한 신호였다.


새로운 CEO 밥 아이거는 ABC방송국 말단 제작보조로 입사해 사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디즈니가 ABC를 인수한 뒤 디즈니 경영진으로 합류한 그는 유연한 교섭력을 가진 인사로 꼽혔다. 그는 긴 내부 검증 끝에 CEO 자리에 올라 디즈니의 내외적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무엇보다도 스티브 잡스와의 갈등 국면을 해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홍콩 디즈니랜드를 방문한 뒤 확신했다. 캐릭터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모두 픽사의 것이었다. 디즈니는 없었다. 그래서 이사진을 설득했다. 디즈니의 생명력은 애니메이션 사업의 성패에 달려있고, 지금의 불투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불을 밝힐 가능성은 픽사를 인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반발은 예상했지만 의외로 흥미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를 만났다. 진전이 있었다. 협상과 재무구조 검토 끝에 74억 달러라는 인수 가격을 합의했다. 그렇게 룩소 주니어는 디즈니랜드에 입성했다.


픽사의 인수합병에 성공한 밥 아이거는 <아이언맨> 두 편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마블 스튜디오와 <스타워즈>라는 불멸의 IP를 가진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 필름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 회사와 콘텐츠를 소유한 21세기폭스를 차례로 인수했다. 이는 모두 디즈니의 전방위적인 사업 안에서 막강한 시너지를 낼 가능성이 충분한 회사들이었고, 디즈니를 독보적인 미디어 제국으로 여기게 만드는 고유명사들이었다. 단적으로 현재 지금껏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흥행기록을 가진 영화 순위를 볼 때 10위권 안에 속한 제목 중 9편이 무려 디즈니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거나 제작에 관여한 작품이다. 이는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디즈니라는 이름으로 상상할 수 없던 것이었다. 전 세계 최고의 흥행기록을 가진 영화들, <아바타>와 <어벤져스: 엔드 게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디즈니가 소유한 IP라는 건 결국 그 모든 천문학적인 인수합병이 디즈니의 자산 가치를 막대하게 높여준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혹은 가장 값비싼 캐릭터나 작품들이 모두 미키 마우스와 한 가족이 된 셈이다.

다운로드 (5).jpg밥 아이거

2019년, 밥 아이거는 디즈니의 OTT 서비스 ‘디즈니플러스’ 론칭을 완수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 그리고 루카스 필름의 <스타워즈> 시리즈와 21세기폭스의 영화와 콘텐츠들을 망라한 디즈니 독점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된 것이다. 밥 아이거는 디즈니플러스로 몇 년 동안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무섭게 성장하는 상황에서 디즈니가 콘텐츠 공급업체로 전락할 것이 자명했다. 내부 자문에서도 디즈니의 독점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도출됐다. 디즈니는 대부분의 OTT 서비스에서 탐낼만한 콘텐츠가 즐비했다. 굳이 다른 논에 물을 댈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디즈니플러스가 론칭했고, 밥 아이거는 2020년 2월에 은퇴했다. 회사의 마지막 숙원 사업을 마치고자 미뤘던 은퇴가 비로소 가능해졌다.


밥 아이거의 뒤를 이은 CEO로 낙점된 건 1993년부터 디즈니에 몸 담았던 밥 체이펙이었다. 비용 절감을 중시하는 운영자로 알려진 그의 임기는 2025년까지 보장돼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22년 11월, 디즈니 이슬롯는 밥 차펙이 CEO직에서 사임했다고 공표했다. 사실상 경질이었다. 2022년 3분기에만 디즈니 스트리밍 사업부는 14억 70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고, 2019년 이후로 누적 손실은 100억 달러 이상으로 불어났다. 4분기에는 유료 가입자수가 지난 분기 대비 240만 명이나 감소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테마파크 사업에서도 고객의 비용 부담을 늘리는 가격 인상과 유료화 정바카라을 고수하며 전통적인 팬덤의 붕괴를 초래하는 악수를 펼쳤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운이 없었다. CEO가 되자마자 팬데믹 상황이 펼쳐지면서 정상적인 사업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몇 가지 논란은 그를 지지하기 어렵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월트 디즈니에서 운영하는 리조트 시설이 있는 플로리다주에서 통과된 소수자 차별법 ‘돈 세이 게이(Don't Say Gay)’ 법안에 대해 밥 차펙은 침묵을 지켜 내부 임직원들의 반발을 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회사의 방침을 최고경영자가 되레 묵과하는 것으로 여겨진 탓이다. 동시에 팬데믹 상황에서 극장 개봉과 동시에 ‘디즈니+’에 공개하는 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블랙 위도우>의 주연을 맡은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극장 개봉과 함께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한다는 소식에 강하게 반발했다. 흥행 수익에 따른 보너스 계약 조건에 위배된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고 뒤늦게 상황이 수습됐지만 프랜차이즈 스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바카라임자들의 권한을 낮추고 비용 절감을 강조하며 콘텐츠의 완성도를 질적으로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몇 년 사이 디즈니는 기존에 없던 것들을 받아들이는 인수합병의 결과를 통해 양, 질적으로 팽창을 거듭했다. 다채로운 자양분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통해 디즈니라는 전통성이 보다 다양한 가능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다양성은 디즈니의 중요한 화두였다. <겨울왕국>이 왕자와 공주의 로맨스가 아닌 여왕의 출현과 자매의 연대를 바탕에 둔 새로운 시대의 마법이 된 것도 이런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지난 몇 년간 논란이 된 작품과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대하는 디즈니의 태도가 대중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PC 주의는 디즈니의 주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지만, 문제는 PC 주의가 아니다. 핵심은 뛰어난 이야기의 부재다.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과 매력적인 세계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만 남은 것이다. 이를테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나란히 서서 전진하는 모습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력적인 세계관과 이야기에서는 진취적인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메시지만 앞서면 피곤해질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됐다는 논란에 휘말린 작품들이 끝내 그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건 해당 작품들이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력의 문제다.


디즈니의 새로운 구원투수로 지목된 건 은퇴한 밥 아이거였다. 2년 9개월 만에 다시 디즈니 CEO로 복귀한 아이거는 디즈니플러스를 포함한 미디어 사업 개편안을 내놓는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바카라임자들의 권한을 강화해 콘텐츠 역량을 끌어올릴 것을 약속했다. 밥 아이거가 위기에 빠진 디즈니를 다시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믿는 밥 아이거가 디즈니를 위한 대대적인 미래를 설계했고, 건설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디즈니의 미래를 맡길 만한 담보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는 처음 CEO직을 맡았을 당시 회사 내 크리에이티브 바카라임자에게 과도한 간섭을 하는 전략기획실의 규모를 축소하는 개편을 단행한 바 있으며 마블 스튜디오의 브레인으로 꼽히던 케빈 파이기가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CEO 아이작 펄머티의 과도한 간섭에 시달려 창작력이 저하되는 상황을 주시하다 보고 라인을 변경하며 마블 스튜디오의 황금기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면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믿음은 지금 디즈니가 직면한 현실에 걸맞은 격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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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는 “디즈니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최우선 목표가 무엇인지 잊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즐거움을 주는 스토리텔링보다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 전달이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결국 다시 원점을 돌아보겠다는 선언이었다. 디즈니랜드가 존재할 수 있는 건 그곳이 디즈니가 제시한 꿈과 환상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다. 디즈니플러스의 수익 개선도 결국 그 믿음의 실현과 비례한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작품 제작 편수를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밥 아이거의 발표는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고 기존의 매력적인 작품에 보다 집중해서 흥행작을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어졌다. <주토피아 2>와 <겨울왕국 3>, <토이 스토리 5>처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속편 제작 소식을 연이어 알린 건 결국 디즈니의 전통적인 팬들에게 보내는 약속의 신호처럼 보인다. 다시 사랑받는 디즈니의 역사를 복원하겠다는 약속 말이다.


그러니까 미래의 청사진은 과거에 그린 청사진과 다를 바 없다. 일찍이 월트 디즈니가 제안한 디즈니 레시피는 ‘스튜디오의 창작적 재능(Creative Talent of Studio)’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이론이었다. 크리에이티브는 디즈니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움직이게 만드는 심장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마이클 아이스너와 밥 아이거가 디즈니의 위기를 해결한 것도 늘 그것이었다. 죽은 창작력의 불씨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방법을 찾는 것. 디즈니의 위기는 결국 디즈니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해내야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디즈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혁신일 것이다. 영광이 없었던 곳에는 위기도 찾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제 팬데믹은 끝났고, 마법의 성은 다시 열렸다. 주문을 외울 때가 됐다.


(2024년 1월에 발행된 카지노 게임 <B> '디즈니' 특집 97호에 쓴 'Brand Story'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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