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호프>에 대한 평
마크 로스코의 추상 앞에서, 감흥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저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걸까 싶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데 미적 소양을 공증받고 싶어서, 솔직한 소회를 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야.
작품에서 이미 방사되고 있는 시선이 있다. 이를테면 ‘미술사적 의의’, ‘현대미술의 거장’ 같은 평. 그림은 순수한 상태로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슬롯적 시선을 머금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시선에 자신을 맞춘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그림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너는 어떤 감상을 말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라캉이 말하는 시선의 변증법이 이 도식이다. 데리다는 이걸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만, 라캉과 데리다를 공부하는 목적이 ‘나는 철학을 이 정도로 공부했다’는 공증을 위한 슬롯적 시선이기도 하다는 역설.
영화 한 편 보면서, 솔직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그렇지. 각자의 취향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지. 칸의 예술성을 이해 못하는 소양인 양 몰아붙이는 이들도 있잖아. 홍길동이야? 재미없는 걸 재미없다고 말할 수 없게...
그 작가의 브랜드가,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잖아. 요즘은 평론가들이 권력일 때가 있어. 자신들이 ‘품평을 해 준다’는 마인드인 경우도 있고... 이동진 평론가의 경우는, 평론도 사람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그 개인의 이미지와 별개로 평론계에 대한 이미지를 증명하는 거야.
들뢰즈의 입장은, 롤스의 ‘무지의 베일’ 식이다.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
물론 공증은 필요한 일이지. 평단의 평가가 상품성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나도 공모전에서 꽤나 떨어졌거든. 그 길이 아니다 싶을 땐, 해체로 돌아서는 것.
나도 문단이고 싶었어. 그런데 뭐 어떡해? 안 되면, 비문단의 길에서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