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과 정신분석
유산소 코스를 달려가다가
도림천에서 올라온 물냄새에 문득.
대도시의 체육센터 수영장에서는 맡아볼 수 없을,
강원도 태생이라 감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어떤 날씨에 유독 진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물냄새가 있다.
유년 시절에 동네 형아들 따라간 개울에서 배운 야매의 영법 도중,
가르는 물살로부터 퍼져나가던 그 냄새다.
뭣도 아니고, 그냥 물냄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았던들...
그 소설에서는 마들렌과 홍차로부터 떠올리는 유년의 기억. 내가 스치듯 맡은 물냄새에서도 그 시절의 형아들과 강원도의 개울을 떠올리듯. 들뢰즈는 사물이 지닌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기억이야 내가 지니고 있는 거지. 사물을 통해 상기되는 것이고... 방점을 좀 더 사물 쪽에 놓는 표현이고, 들뢰즈는 이걸 ‘기호(sign)’라고 하는 거야. 언어학에서보다 확장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다.
들뢰즈는 ‘기호’를 라캉의 ‘요구’에 결부시킨다. 무의식이 건네는 어떤 시그널. 잊고 사는 지향의 가치를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는 것. 그렇다고 내가 수자원공사에 들어가고 싶은 꿈을 지니고 있었던 거겠어? 그 지점에서 일어났던 것, 바라보던 것들을 대표하는 심상일 뿐이다.
라캉은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 나오지 못하고 시달리는 것을, 행복의 정체로 설명한다. 그것이 흔히 정의되는 행복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 열망이 해소가 되지 않기에 그 대리물에 집착하는 것. 대표적으로 돈. 실상 돈이 목적인 게 아니야.
하여 쁘띠부르주아 한량으로 평가받던 프루스트가 유년 시절을 돌아보며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
한 번 유년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들추어내기 싫은 기억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신분석의 상담도 그것과 마주하는 것으로, 그것과의 대화 속에서 단서를 찾는 것. 대표적인 사례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어쩌면 당신이 지닌 거장의 잠재성도 그 시절에 두고 왔는지 모를 일. 미래는 때로 과거에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