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 자신의 이야기 전개와는 모순되는 바카라 이론의 설명으로 끝을 맺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거짓 자서전적 소설이 된 생트-뵈브에 대한 프루스트의 ‘에세이’ 안에서도 이 혁명은 계속 된다. ... -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중에서 -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가 살아온 시간을 알아야 하는 것인가에 관한 문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린 시절의 회상 끝에 찾아낸 어린 시절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프루스트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꼭 프루스트의 삶을 알고서 프루스트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게 올바른 감상일까? 프루스트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프루스트의 소설에 이입 가능한 각자의 회상이 있는 바, 주인공이 사랑한 여인은 각자가 사랑했던 과거의 누군가의 경우이기도 하다. 또한 주인공과는 애매한 감정의 관계일 뿐, 정작 사랑하는 동성의 대상이 따로 있었던 그 여인은, 동성애 코드가 아닐망정, 결코 닿을 수 없었던 과거의 누군가의 경우이기도 하다.
각자가 살아온 시간으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한다. 이 경우가 차라리 작품의 확장성을 확보하는 것.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 저자의 작품은 현상학적 대상이기도 하다. 각자의 해석만큼 분화하며, 각자의 세계로 읽어 내리는 각자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는 것.
생트뵈브는 프루스트와 대척의 문학관을 지닌 대상이지만, 실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작가의 일대기를 자전적으로 다룬 소설이니까, 한 작가가 살아온 시간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것이니까, 모순이라고 말한 것. 재미있는 사례지?
곧 출간될 <절망없는 사랑이 어디 있나>의 저자 분에게,
과거의 누군가를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아무리 사랑해도 닿지 않던 너,
그 반대로, 나는 마음이 없는데 지칠 줄 모르고 다가오던 선배.
드디어 만난 인연, 그와의 사랑에서 깨닫는 것들.
한 여인이 겪은 세 번의 계절을 다루는 이야기이지만, 한 남자가 겪은 세 번의 계절이기도 하다. ‘너’였던 적도, ‘선배’였던 적도, ‘그’였던 적도 있는 입장에서 읽는다면, 결국 나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각자의 사랑에는 각자의 절망이 있는 법, 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 있나. 사랑하지 않았던들 상처받지 않았으리라. 그 절망의 깊이만큼으로 사랑하는 것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