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의 문학관, <동심설(童心說)>

니체, 노자, 맹자, 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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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旣以聞見道理爲心矣 則所言者皆聞見道理之言 非童心自出之言也

무릇 이미 견문과 이론으로 마음을 삼으면, 말하는 바는 모두 견문과 이론의 말이지 동심이 스스로 내는 말이 아니다.


명나라의 문인 이지(李贄)의 <동심설(童心說)>의 한 구절이다. 이 글의 요지는 선지식으로 고착화되지 않는 아이의 시선이야말로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가닿을 수 있는 직관이라는 것. 아이들은 현상 그 자체를 즐기기에 항상 궁금해 하고 흥미로워 한다. 어른들의 인식은 현상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자신이 경험한 범주 너머의 가치에는 여간해선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자신의 지평 너머에 있는 세계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렇게 흥미롭지도 않다. 그러나 또 그 지평 너머의 사안들에 자신의 경험으로 대답을 내놓으려 한다.


‘동심설(童心說)’은 문학은 수양과 세련으로만 가능할 수 있다는 기존의 성리학적 문학관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문학이론이다.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수양과 세련이란, 성리학의 토대가 되는 경전과 시문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토록 ‘글공부’에 매진했던 것. 그 시대에는 그것이 곧 벼슬을 얻는 수단이기도 했기에, 그런 아비투스(habitus)를 향유할 수 있는 계급들만이 진정한 문인이 될 수 있다는 불평등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율곡에 의해서 情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순수한 마음만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문학관이 성행하면서, 문학은 사대부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체제 안에서 습득되어지지 않는,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함이 언어로 배열된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의 범주는 양반에게서 중인과 여자들에게로까지 넓어진다. 이런 연유로 주자의 성리학에 반기를 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기도 했다. 또한 어찌 사대부들만의 문체만이 문학일 수 있느냐는 물음이 던져지면서, 저작거리에서 유행하던 소설이 비로소 문학에 범주로 들어선다.


문제는 이를 증명해 낼만한 필력들이 없었다는 점. 이런 글을 능히 쓰지 못하는 자가 저런 글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 이런 글밖에 쓰지 못하는 자들의 변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글도 잘 쓰면서 저런 글에도 능한 자가 이런 글을 옹호하는 게 보다 설득력 있지 않겠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저작거리의 문학을 선도했던 연암 박지원은 시대의 부름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문학이 과연 연암의 입장인지, 아니면 사대부들의 입장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니체가 애용하는 아이의 메타포는 그런 해체의 담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암의 사상과 니체의 철학을 도리어 그들이 가장 증오했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지식인들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 ‘지식은 권력’이라 비판한 푸코의 철학조차도 권력적 지식으로 순환하는 유치함. 그 모두가 생각의 성장판이 닫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아이는 항상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며 늘 즐거울 수 있는 존재다. 생성과 가능성으로 똘똘 뭉쳐 있는, 내일의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 즐거운 순간순간으로 세상을 대하는 단계다. 니체의 화법을 그대로 빌리자면,


아이는 순진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선,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했던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노자의 사유를 꿰고 있는 주제 역시 기성과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의 중심에는 항상 ‘어른’이라는 훼방꾼이 있다. 항상 자신들이 옳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이룬 떡공장 공장장들의 대동단결. 노자가 이런 고지식함을 돌파하고자 제시한 키워드가 ‘아이’이다.


專氣致柔 能嬰兒乎 기를 모아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

滌除玄覽 能無疵乎 그윽한 마음을 씻어내고 거두어내어 흠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노자에게 柔와 弱은 生을 의미한다. 죽고 굳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아직 신축성과 유연함으로 살아있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생성하는 열려진 세계이다. 그런데 실상 이는 공자의 계보들이 견지한 관점이기도 했다. 맹자가 이르길,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큰 인물이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다. 조선 양반네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유교를 숭상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유교의 정신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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