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어도, 그래도 여전히 제주

byLiA

요즘 제주의 날씨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정작 비가 쏟아져야 할 장마철에는 생각보다 얌전하게 지나가더니, 어느새 열대지방의 스콜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굵은 빗줄기를 후두둑 쏟아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습하고 눅진한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잠시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이 걷히고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쏟아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꾸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오늘의 날씨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헛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날씨가 싫지 않아졌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아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이면 어김없이 갑작스러운 비를 만나기도 하고, 모처럼 마음먹고 나선 길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계획을 잠시 미뤄야 할 때도 있다. 예전 같으면 하루의 흐름이 틀어졌다고 생각했을 텐데, 요즘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서둘러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 잠시 멈춰 있는 쪽을 택한다.


집에 있는 날이라면 창문을 조금 열어둔다.


빗물이 안으로 들이치지 않을 만큼만 창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방 안까지 천천히 번져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비에 젖은 나무 냄새가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고, 빗줄기에 흔들리는 초록을 바라보고 있으면 분주했던 마음도 조금씩 속도를 늦춘다.


꼭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뤄두고, 지금 내리는 비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빗소리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오래 이어지는데,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빗소리가 잦아든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조금 전까지 회색빛이었던 세상에 다시 색이 돌아온다. 비를 머금은 나뭇잎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평소에도 충분히 푸르다고 생각했던 제주 특유의 초록은 비를 맞고 난 뒤 한층 더 짙어진다. 길 위에 고인 물웅덩이에는 파란 하늘이 담기고,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작은 빛처럼 흔들린다.


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비가 오기 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남는다.


그래서인지 제주의 날씨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조금씩 달라졌다.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날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바다의 표정도 하루가 다르고, 같은 길을 걸어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아침에는 잔잔했던 바다가 오후가 되면 거센 바람을 만나 거칠어지기도 하고,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길가의 작은 꽃이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와 한참 발걸음을 붙잡기도 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 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예전만큼 불편해하지 않는다.


꼭 가려고 했던 곳에 가지 못하면 다른 날 가면 되고, 기다리던 날에 비가 오면 잠시 쉬어가면 된다. 오늘 보고 싶었던 풍경을 보지 못했다면 다음 날 다시 보면 그만이다. 제주에서는 조금 늦어도 괜찮고,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섬의 시간이 원래 그런 것인지, 이곳에서 오래 지내며 나도 조금씩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전에는 지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을 요즘은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듣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햇살이 좋은 날에는 이유 없이 조금 더 천천히 걷는다.


아마 그것으로 충분한 날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제주의 표정이 좋다.


습기가 가득한 날에는 짙어진 숲내음이 좋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창문을 열어두고 오래도록 빗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비가 그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갠 하늘이 눈부셔서 좋고, 바람이 거센 날에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거친 소리가 좋아 한참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제주의 매력은 늘 좋은 날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날조차도 결국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어버리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비가 오고 내일은 햇빛이 쏟아질 것이다. 그다음 날에는 다시 구름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미리 알 수 없지만 이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의 하늘을 보고, 오늘의 바람을 느끼고, 오늘 내게 주어진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려고 한다.


사람의 마음도 날씨와 많이 닮아 있으니까.


맑았다가 흐려지고, 아무 이유 없이 비가 내리는 날도 있고, 한참 흐린 뒤에야 햇살이 드는 날도 있다.


그러니 조금 흐린 날이라고 해서 너무 서둘러 맑아지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잠시 그 빗소리를 듣고,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창문을 열어 바깥의 공기를 천천히 들여놓고, 다시 햇살이 비추는 날이 오면 그때 마음껏 바라보면 된다.


제주가 매일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매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종잡을 수 없어서 조금 번거롭고, 때로는 계획을 어긋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섬의 제멋대로인 리듬이 참 좋다.


오늘의 제주가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내리면 비가 오는 대로.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하늘이 맑아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햇살을 오래 바라보면 된다.


그래서 오늘도 제주를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뇐다.


종잡을 수 없어도, 그래도 여전히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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