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한순간에 갈라졌다.
예고도 없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금세 굵은 줄기를 이루며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 선명하고 시원한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세상이 떠나가라 쏟아붓더니, 비는 참 싱겁게도 금방 멎어버렸다.
잠시 숨을 고르듯 스쳐 지나간 찰나였는데 창밖의 공기는 이미 다른 계절로 건너가 있었다.
비가 그친 자리에 묘한 침묵이 먼저 고였다. 방금 전까지 요란하게 유리창을 두드리던 소리가 멎자,
집 안으로 스며드는 적막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오래 머물던 늦여름의 끈적한 열기는 빗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고, 열어둔 창가로 다가가 손을 얹으니 창틀에 밴 차가운 습기가 손끝에 닿았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의 결이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
슬그머니 긴소매 옷을 찾게 만드는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이맘때의 서늘함을 유난히 좋아한다.
온몸을 지치게 만들던 더위가 가시고 나면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때문이다.
여름내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서늘해진 공기 속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창밖을 가만히 내다본다. 젖은 나뭇잎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서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서늘해진 공기만큼 마음도 조금씩 고요해지고 있었다.
서늘해진 공기에 팔을 쓸어내리다 조용히 옷장을 열었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실감은 달력의 숫자보다 옷장의 풍경에서 먼저 찾아온다.
여름내 부지런히 입었던 얇고 가벼운 반소매 옷들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내고,
서랍 깊은 곳에 단정히 개켜두었던 헐렁한 가디건과 긴소매 셔츠를 꺼내 올렸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옷감에서는 말라붙은 섬유유연제 향과 서늘한 그늘 냄새가 섞여 났다.
어깨 위로 툭 걸쳐 입는 순간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마음에 묘한 안도감을 준다.
살갗을 드러내고 무더위와 세상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던 나를, 도톰한 천 한 겹이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는 기분이다. 돌아보면 여름의 옷들은 어떻게든 열기를 털어내고 버텨내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가을의 옷들은 흩어진 마음을 가만히 모으고 품어주기 위한 쪽에 가깝다.
손등을 반쯤 덮는 긴 소매 끝을 매만지며, 비로소 내 몸과 마음에 딱 맞는 온도를 찾았다는 안도에 젖어든다.
손등을 덮은 소매를 한 번 쥐었다 펴며 방 안의 공기를 가만히 응시한다.
가을의 서늘함이 반가운 건, 핑계처럼 스스로를 조금 더 다정하게 감싸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