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품격이란 타고난 넉넉함이나 자연스레 주어지는 여유 속에 깃드는 것인 줄 알았다. 좋은 환경에서 그늘 없이 자라난 사람 곁에 머무는 자연스러운 빛, 혹은 결핍을 겪어보지 않은 이의 구김 없는 미소 같은 것 말이다. 풍요가 주는 편안함 속에서 품격은 그저 당연하게 피어나는 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이라는 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맨몸으로 지나오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짜 품격은 모든 것이 평온하고 채워져 있을 때가 아니라, 손에 쥐었던 것들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세상의 바닥이 흔들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조건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그 사람의 고유한 태도, 그것이 바로 진짜 결이었다.
마음에 서늘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일수록 나는 몸을 더 바르게 세운다. 눈을 뜨자마자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손으로 팽팽하게 펴서 정돈하고, 정갈하게 내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주하며 구겨진 옷깃을 단정히 여민다. 보이지 않는 식탁 위의 먼지를 훔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일지라도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는다.
세상이 내 속사정을 알아주지 않고 무거운 현실이 어깨를 짓누를 때조차 내 일상의 최소한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노력. 비록 내 손에 쥔 것은 전보다 가벼워졌을지라도, 내 하루를 함부로 내팽개치지 않겠다는 이 작은 몸짓들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귀하고 애틋한 예의다.
우아함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환경이나 화려한 치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거친 돌밭을 걸어야 하는 순간에도 남을 탓하거나 비관에 빠지지 않고, 묵묵히 내 몫의 하루를 정성스레 살아내는 사람에게서만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기품이다.
누구나 인생의 겨울을 만난다. 그러나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해서 마음마저 황량하게 내버려 둘 이유는 없다. 삶의 계절이 아무리 변하고 바람이 차가워져도, 나는 여전히 나답게 단정히 걷고 싶다. 화려하지 않아도 맑고, 소란스럽지 않으며,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줄 아는 그 단단한 마음가짐 하나를 오늘도 조용히 가슴 깊이 품어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