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하나

작품1.jpg

지난 39년 간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일을 하다가 금년부터는 프리랜서란 이름하에 40년 차 슬롯생활을 시작했다. 프리랜서의 생활은 가끔(아주 가끔^^) 요청 들어오는 강의와 코칭을 하고 나면 예전처럼 바쁘게 살지 않고 아주 느린 삶을 살게 해 준다.



처음에는 지난 39년의 관성이 나로 하여금 나의 삶의 속도에 답답함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몇 달이 지나다 보니 안단테 속도의 느린 삶이나 라르고 속도의 매우 느린 삶도 참 매력이 있다.



아무 계획 없이 경로 우대 지하철 카드 한 장 들고 공짜로 부담 없이(^_^) 어느 지하철 종점 역에 가서 그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것도 좋고 4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도 언제 한번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을 다녀오는 것도 좋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문화 회관의 문화 강좌에 생전 처음 등록을 했다. 연필 스케치를 배우는 미술 강좌인데 첫 스케치를 보고 강사님이 예전에 미술전공 하셨냐며 립서비스를 해주신다. 아~ 이 화법은 내가 강의할 때 주로 쓰던 화법인데....



그래서 저는 평생 이과 출신으로 대학도 공대, 슬롯생활도 40년간 IT만 해서 미술이란 것은 중학교 이후 처음 해 본다고 하자 강사님은 천부적 자질을 가지셨다고 또 현란한 영업 멘트를 날리신다. 아무래도 2달 뒤 또 등록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세 번째 수업만에 나의 작품하나가 완성되었다. 작품을 가족들에게 공유하니 아이들이 국전에 출품하라고 또 립서비스를 날린다. 여기에 사용한 색연필은 얼마나 더 수업을 들을지 몰라 새로 사기 뭐해서 집의 창고를 뒤지다 보니 우연히 발견한 색 연필이었는데 예쁘게 깎여져 있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색연필 세트였다. 이게 어디서 났냐고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가 그건 큰애 유치원 다닐 때 내가 일본 출장 가서 사다 준 색연필 세트라고 한다.



큰애 유치원 때 일본 출장이면 1993년인데 이 색연필 세트는 33년 간 한 번도 쓰이지 않고 있다가 그 오랜 세월 뒤에 나에게로 돌아와 나의 첫 작품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유치원생 딸아이는 어느새 결혼해서 집 떠난 지 4년이나 되었는데....



세월이 언제 그렇게 빨리 지났는지... 그동안 나의 프레스토(매우 빠르게) 알레그로(빠르게) 속도의 삶은 모데라토(보통 빠르게)의 속도를 거쳐 이제 안단테와 라르고의 삶의 속도로 변해 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예전에는 경험해 보기 힘든 한낮에 중계하는 월드컵 경기를 맥주 한잔 하면서 즐기는 안단테와 라르고의 삶을 만끽 할 예정이다.

작가의 이전글아티아고 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