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be
삶을 긍정할 수 없는 시간에도 삶은 사멸하지 않고 굳어지지 않습니다. 볼테르의 철학소설 <캉디드>의 팡글로스는 비극이더라도 존재의 땅에 펼쳐진 모든 것들을 최선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삶은 최선의 것이 펼쳐진 환희의 전당과 같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더라도 삶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갑니다. 한숨과 푸념이 얼마쯤은 삶의 한가운데에 놓이고, 때때로 절망이 삶을 지배하더라도 말입니다.
삶은 사람을 참 무력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꼭 무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 온 뒤에 날이 개고, 어둠의 장막이 걷히면 볕이 들기도 하니까요. 설령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고, 깔린 어둠이 자리를 비우려 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비와 어둠에 적응하며, 어제의 한기와 그제의 불안을 그리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은 참 얄궂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송진권 시인의 시를 읽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고,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도 생각났습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결대로
송진권
도끼로 장작을 빠갤 때
힘만 믿고 있는 힘껏 내리찍으면
죽은 나무도 벌떡 일어나서
정강이를 걷어차거나 눈두덩을 때린다
고기도 마찬가지다
제 솜씨 없는 건 생각 안 하고
칼날이 무디네 고기가 질기네 푸념만 하면
죽은 짐승도 살아나 손을 물어뜯어 피를 보게 한다
솜씨 좋은 나무꾼과 숙수는
결을 살펴 결대로 칼을 대고 도끼날을 박는다
힘을 빼고 내리쳐도 장작은 두갈래로 빠개지고
고기는 뼈와 살로 나눠진다
하물며 거슬러 오르는 마음도 마찬가지
자꾸 솟구치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면
화산처럼 터지거나 잿더미가 되니
결대로 두어 저절로 흐르게 하라
그 위에 살포시 나뭇잎 한장이나
꽃잎으로 얹히거나
결대로 두라는 화자의 말이 '흐르는 강물처럼'을 연상시켰습니다. 억지로 무언가 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말이 강물 위에 낚싯줄을 풀어놓던 영화 속 인물들을 연상시킵니다. 어쩌면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낚싯줄을 던져 놓는 것 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대로 두고, 흐르게 하라는 말 견디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흐르는 강물 위에 낚싯줄을 던져놓았습니다. 견디기 힘든 상실을 마주하고도 시간은 이어지고, 저는 그 속에서 일상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놓인 자갈 같다고 생각했던 돌이 뿌리가 제법 깊어 도무지 빼내기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파고 또 팝니다. 숱한 결정과 행동으로 이어진 삶은 살면, 살아지는 것이 되는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지요. 비단 살아지는 것만이 아니라 어느 날에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낚아 올리는 경험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기력할 수 있지만, 무력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을이 됐습니다. 가을의 절기에 든 지는 한참 됐습니다만, 계절의 변화가 더뎠던 탓에 이제야 진정 가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해를 한 번쯤 정리해 두어야 지난 시간의 의미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됐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을 또 한 번 봐야 하는 계절이 또 찾아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