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전의 끝
공회전으로 보내던 시간이 이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에 내 좌표마저 지워지는 듯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변하는 흐름에 맞춰 함께 변해야 어제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무산의 시간은 그들의 변화에서 나를 떼어 놓았다. 나를 두고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나를 지우려 했다.
모든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자꾸만 밀려났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 속에서 내가 사라졌다. 나를 자꾸만 뒤에 두고 흘러가려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좌표를 잃었고,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위해 빨리 뛰었다. 그러나 매번 허사로 끝났다. 끝없이 반복되는 무산, 결국 달리는 것조차 무의미해졌다.
멈췄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달려도 사라질 운명이라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멈췄다. 나를 삭제하려고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어제에 머물지 않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시작점, 내 좌표를 찾으려 멈춰 섰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졌을 때,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현듯 나를 덮쳐 오던 불안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리고 불안에 가려 있던 내 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을 내 곁에 두었다. 시간을 곁에 두고, 어제 머물지 않기 위해서 서서히 걸었다.
무산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낱 고갯마루 같던 언덕이, 멀리 다른 고갯마루들이 보이던 그곳이 높은 봉우리가 되어 있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겁내지 않았을 높이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오르지 않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걷고 또 걸었다. 산을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걷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미끄러졌다고 멈추면 산을 오를 수 없기에 걸었다.
다음 봉우리로 향할 수 있는, 이제는 고갯마루가 된 어제의 그 봉우리에 올랐다. 아직 마쳐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공회전으로 닿지 못했던 지점에 서 있다. 길고 고된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버텨냈다. 숱한 봉우리를 고갯마루로 남기며 걷고 또 걸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