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th
나는 큰 흐름 속에서 작은 부분들을 조금씩 수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을 어렵게 해서 그렇지, 간단하게 말하면 매일 비슷하게 산다.
일.
집.
운동.
공부.
바카라.
거기에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청소를 한다.
거의 나의 정해진 루틴이다.
왜 이렇게까지 루틴을 지키며 사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냥 이게 좋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집중해서 볼 것이 있다는 것.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
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 고맙다.
가끔은 나도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런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물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해봤다.
그리고 알았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나는 집에서 조용히 바카라을 읽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런 내가 이제는 이 루틴 안에서 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생각했다.
‘내가 변할 수 있을까?’
그때의 대답은 거의 확실했다.
‘절대 불가능.’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변하고 있다.
자식이라는 존재와 마주치면서 말이다.
집 안의 분위기도 달라졌고,
내 시간도 달라졌고,
내 감정도 달라졌다.
신기한 것은 그것이 생각보다 거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게 자식의 힘인가?
나는 원래 침착하고 조용한 편이다.
생각이 많고, 자극적인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너무 지루한 것은 싫다.
미루는 것도 싫어한다.
이 정도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되실 것 같다.
그런 내가 지금은 바카라을 읽다가도 딸이 놀자고 하면 바카라을 덮을 수 있게 되었다.
공부하다가도 딸이 찾아오면 같이 놀 수 있다.
물론 그냥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딸의 예측 불가능한 요청 때문에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일을 더 미리 해놓게 되었다.
시간을 더 잘게 나누고,
할 수 있을 때 해놓는다.
나중에
‘딸 때문에 못 했다.’
‘시간이 없어서 못 했다.’
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핑계와 변명은 나에게 더 불편하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몸이 좀 고되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내일은 금요일이다.
이 글을 앞에서부터 읽어오신 분이라면 무슨 날인지 아실 수도 있다.
그렇다.
딸이 고모네 가는 날이다.
어쩌면 우리 딸은 일주일을 금요일 하나 기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매주 목요일 밤이면 딸과 함께 작은 캐리어를 챙긴다.
갈아입을 옷.
속옷.
잠옷.
필요한 물건들.
그러면서 잔소리인지 교육인지 모를 말들도 하나씩 넣는다.
“고모 말 잘 듣고.”
“고모 힘들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건 조금씩 도와주고.”
그리고 가끔 이런 말도 한다.
“너 나중에 커서 고모들한테 진짜 잘해야 돼. 아빠보다 우리 딸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면 딸은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도 열심히 이해해보려고 한다.
나는 그 표정이 좋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라도 일단 들어보려는 얼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과 순간에 집중하는 모습.
나는 그런 순수함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동물을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동물보다 아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저 순수함을 보면 가끔 감탄하게 된다.
하여튼 우리는 금요일 저녁 고모가 운영하는 식당에 도착했다.
딸은 고모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갔다.
“고모! 오늘 나 고모 집 가는 날이야!”
그러고는 고모에게 안겼다.
저것도 패턴이다.
매주 똑같다.
그런데 신기하다.
어떻게 매번 똑같은 일을 하면서 저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면서 그것을 안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매주 똑같은 금요일을 처음 맞는 금요일처럼 좋아한다.
‘저런 태도는 나도 좀 배워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근데 어떡하지? 고모 감기 걸렸어. 오늘은 고모 집에 오지 말고 다음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래. 고모 아프니까 오늘은 집에 가자. 오랜만에 아빠랑 놀자. 매일 학교 간다고 일찍 자서 아빠랑 제대로 못 놀았잖아.”
그러나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그건 아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으니까.
“왜?”
“고모 감기 걸렸잖아.”
“조심하면 되잖아!”
“그래도 옮을 수 있어.”
“나 고모랑 멀리서 놀게.”
“그래도 안 돼.”
“마스크 쓰면 되잖아.”
이럴 때 보면 아이의 순수함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참 힘들다.
아이는 자신이 왜 고모네 가야 하는지를 자기 나름대로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듣다 보면 제법 그럴듯하다.
나는 일단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안 돼. 고모 아프잖아.”
딸은 고양이 같은 눈으로 고모를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한번 바라봤다.
다시 고모. 다시 나. 이 반복 속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옆을 보니 이미 한 사람이 무너지고 있었다.
고모였다.
아. 끝났다.
나는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았다.
결국 고모가 말했다.
“그래. 그럼 감기 안 걸리게 진짜 조심하자.”
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딸이 이 속담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몸으로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캐리어를 건넸다.
“딸. 고모 감기 걸렸으니까 진짜 조심해서 놀다 와.”
“응!”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운동도 했다.
오랜만에 게임도 했다. 바카라도 읽었다.
밀려 있던 것들도 조금씩 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었다.
딸을 데리러 갔다.
그런데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코도 막혀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감기였다.
고모도 미안한 표정이었다.
조카에게도 미안하고,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나에게도 미안한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러니까 가지 말자고 했잖아.’
‘조심하라고 했잖아.’
‘이제 며칠 동안 일정도 다 바뀌겠네.’
‘학교는?’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리고 바로 그때,
그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 왔다.
이 녀석이 좋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단 내 마음부터 들여다봤다.
‘내가 지금 왜 화가 나지?’
감기는 누구나 걸릴 수 있다. 아이가 일부러 걸린 것도 아니다.
아직은 누군가가 챙겨줘야 하는 나이다.
그렇게 몇 번 생각했더니 신기하게도 올라오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오, 신기한데?’
잠깐 바라봤을 뿐인데 내려가네.
나는 속으로 조금 뿌듯했다.
이제 나도 제법 하는 건가?
어느 때처럼 순간의 착각이었다.
딸과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차에 탔다.
그런데 운전을 시작하자 이상한 느낌이 다시 올라왔다.
‘뭐지?’
아까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난 게 아니었다.
잠깐 눌러놓았을 뿐이었다.
그때 뒷자리에서 딸이 재채기를 했다.
“에취!”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참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말했잖아! 감기 걸리니까 조심하라고!”
말하고 나서 바로 알았다.
아. 또 졌다.
그놈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죄바카라감 하나만 내 앞에 던져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한 번도 이 녀석을 깔끔하게 이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딸에게 사과했다.
“아까 아빠가 큰소리 내서 미안해.”
씻기면서 일부러 웃겨주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줬다.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했기에 아이를 일찍 재웠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혼자 생각의 의자에 앉았다.
그놈을 다시 불러올 시간이었다.
왜 화가 났는지.
어디서부터 흔들렸는지.
아까 내가 했던 방법은 왜 잠깐밖에 통하지 않았는지.
다시 살펴봐야 했다.
방의 불을 끄고 독서등 하나만 켰다.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있으니 무슨 원주민 주술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호흡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와.’
‘이번에는 도망가지 말고 나랑 이야기 좀 해보자.’
물론 진짜로 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심연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놈이 걸어 나오지도 않는다.
그냥 내 마음을 그렇게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방식이 꽤 잘 맞는다.
나는 조금 전 딸과 있었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딸의 재채기.
내 목소리.
“아빠가 말했잖아.”
그 문장을 계속 들여다봤다.
‘왜 저 말이 나왔지?’
처음에는 당연히 딸에게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가 보니 이상했다.
화의 방향이 딸에게 있지 않았다.
아.
알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화풀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번에는 자바카라이 밀려왔다.
‘아직도 이러고 있네.’
‘아이한테 왜 그래.’
그런데 그때 또 멈췄다.
아니다. 지금은 나를 때릴 시간이 아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자바카라한다고 다음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감기에 걸린 딸을 봤을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가.
하나씩 생각해 봤다.
첫 번째.
일정이 틀어진다는 불편함.
아이가 아프면 내가 계획했던 일정이 바뀐다.
학교도 신경 써야 하고,
약도 챙겨야 하고,
밤에도 봐야 하고,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도 조금씩 밀린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생활의 틀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했다.
두 번째.
고모에 대한 서운함.
‘어른인데 조금 더 조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고모가 일부러 감기를 옮긴 것도 아니다.
조심한다고 감기에 절대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아무리 조심해도 감기에 걸릴 때가 있다.
그런데 왜 고모에게는 완벽하게 막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세 번째.
그리고 이게 가장 깊었다.
딸이 아픈 것이 무서웠다.
나는 아이의 공부가 조금 늦는 것은 크게 두렵지 않다.
성적이 조금 떨어지는 것도,
남들보다 무엇을 늦게 배우는 것도,
지금은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다.
나는 아이의 인생이 결국 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주고,
조금 더 크면 자신의 꿈과 목표를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아픈 문제만 나오면 마음이 달라진다.
작은 감기인데도 그렇다.
아이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 어딘가가 불안해진다.
왜 그런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없어서인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서인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내가 딸에게
“감기 걸린다고 했잖아!”
라고 화를 낸 것은
단순히 아이가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계획이 틀어진 불편함도 있었고,
고모에 대한 서운함도 있었고,
아이가 아픈 것을 보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섞여 가장 만만한 한 문장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빠가 말했잖아.”
생각해 보면 참 편리한 말이다.
내가 옳았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바카라임도 상대에게 넘길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픈 것도 힘든데,
아빠에게
‘그러니까 내 말 들었어야지.’
라는 말까지 들어야 한다.
그제야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옳았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그 말을 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문제를 조금씩 다시 정리했다.
일정이 조금 틀어진다고 내 삶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바쁘게 움직이면 된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된다.
고모도 완벽할 수 없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감기는 아무리 조심해도 걸릴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걸린 감기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픈 아이를 잘 돌보는 것.
그리고 내 불편함을 아이에게 화로 던지지 않는 것.
그 정도였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조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딸은 왜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모네 가고 싶어 했을까?
물론 여덟 살 아이가 감기라는 위험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계산했겠느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재미있는 질문이었다.
딸도 감기에 걸리면 힘들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도 가고 싶었다.
아마 그 순간에는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보다
‘고모네 가고 싶어.’라는 마음이 훨씬 컸을 것이다.
나는 늘 결과를 먼저 계산한다. 이걸 하면 내일 힘들까.
시간이 얼마나 들까. 내 일정에 문제가 생길까. 괜히 했다가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데 아이는 달랐다.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했다.
좋으면 좋다고 했다.
고모가 보고 싶으면 고모에게 달려갔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의 행동을 무조건 ‘용기’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냥 결과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게 어른의 철학을 억지로 붙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질문이 생겼다.
나는 언제부터 결과를 너무 많이 계산하며 살게 되었을까?
실패할까 봐.
손해 볼까 봐.
귀찮아질까 봐.
일정이 틀어질까 봐.
아플까 봐.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을 얻는다.
그건 분명 필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이 너무 커지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지금 하고 싶은 것까지 포기하게 되는 순간도 생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서 배워야 할 것도 있지 않을까.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무모함이 아니라,
결과만 생각하다가 삶을 놓치지는 않는 태도. 나는 그것을 순수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만 어른에게는 거기에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카라임감.
내가 선택했다면 그 결과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
실패했다면 다시 고치고, 판단이 틀렸다면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사과하고,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는 것.
어쩌면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알면서도 선택하고,
그 선택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다시 바카라임질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바라보고,
내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타인의 말을 충분히 들으면서도 마지막에는 스스로 판단하고,
내 선택이 만든 결과를 조금씩 내가 바카라임지는 것.
그런 사람이 어른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고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 같은 순수함까지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쁘면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달려가 안기고,
매주 반복되는 금요일인데도 처음 맞는 금요일처럼 기다리는 마음.
나는 오히려 그런 것을 조금 되찾고 싶다.
바카라임감은 어른에게 필요하지만,
순수함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숙한 어른은 순수함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순수함에 바카라임감을 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날의 나에게도 똑같은 말이 필요했다.
딸에게 화를 낸 것을 자바카라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화를 냈는지 알아보고,
잘못했다면 사과하고,
다음에는 조금 다르게 행동해 보는 것.
그게 내가 바카라임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딸은 감기 때문에 코가 막혔는지 가끔 뒤척이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딸의 방으로 갔다.
이불이 조금 내려가 있었다.
나는 이불을 다시 목까지 올려주고 잠시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그래. 아빠가 말했었지.’
‘감기 걸릴 수도 있다고.’
그런데 이번에는 그다음 말이 달랐다.
‘그래도 이미 아픈데, 지금 필요한 건 그 말이 아니지.’
나는 방문을 조금 열어둔 채 방을 나왔다.
내일 일정은 조금 꼬일 것이다.
내가 하려던 일도 몇 개는 미뤄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일 아침,
아픈 딸에게 죽부터 끓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