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첫사랑 진행 중

by연두




"엄마, 나 남자친구 있으면 어떨 거 같아?"

"글쎄 왜? 너 혹시 좋아하는 친구라도 있어?"

"아니 그냥."



그녀는 중2다. 아직은 어리게만 보았는데 아마도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넷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복도 끝에 모였다. 가방을 열어 서로의 가방 속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SH네 집에 도착해 각자 가져온 것들을 하나둘 꺼냈다. 잡다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색색의 하드보드지와 골판지, 색지들과 철사, 스카치테이프, 목공풀, 가위, 색연필, 스티커, 리본, 종이꽃, 포장지, 반짝이가루, 스타핑,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콜릿.



바야흐로 밸런타인데이였다. 우리는 모두 '첫사랑 진행 중'이었다.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가사로 이 표현을 꼭 한번 쓰고 싶었다.) 마침, 밸런타인데이가 졸업식날이었다.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는 초콜릿을 만들어 짝사랑남에게 주면서 고백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사뭇 진지했다. 그렇지만 그 진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르르 몰려간 친구집에서 밀린 수다를 참을 수 있는 여중생이 있을까. 매일 보는 사이였지만 하고 싶은 말이 동나는 법은 없었다. 한번 열린 수다의 수문은 어지간해선 닫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점심시간에 매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고, 어젯밤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를 꺼냈다. 수업시간마다 아무나 불러 세워 곤란한 질문을 하고 창피를 주던 슬롯선생님 흉을 보면서 대동단결했다. 누군가 걱정이나 고민을 말하면 감 놔라 배 놔라 훈수를 뒀다. 대개 해결되기는커녕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마련이었지만,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왁자지껄 웃고 떠들다가 문득 뭐라도 먹자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 갑자기 중요한 것을 깨우치기라도 한 듯 우르르 몰려가 라면을 끓였다. 한 명은 라면물을 올리고, 한 명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한 명은 물을 따르고, 한 명은 수저를 놓으면서도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렇게 끓여 먹는 라면은 얼마나 맛있었는지.



어느덧 어두워졌다. 그제야, 누군가 방 한쪽으로 밀어둔 준비물들을 가리키며 우리 이거 대체 언제 만들 거냐고 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여기에 온 이유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즐겁게 다시 집에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거기에 간 목적을 상기했다. 우리는 각자 자르고 접고 오리고 붙였다. 꽤 진지하고 경건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이토록 가슴 충만한 일인지 처음 느꼈다. 내 마음을 구체적인 형태로 고스란히 빚어내는 일이었다. 최고로 예뻐야 했고 무엇보다 특별해야 했다.



나는 하드보드지로 노트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정사각형 상자를 만들었다. 스타핑을 잔뜩 채운 뒤 하트모양으로 엮은 초콜릿 꾸러미를 그 위에 살포시 얹을 생각이었다. 하트라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더워졌다. 너무 노골적인 게 아닌가 싶었는데 친구들은 그게 맞다고 했다. 부끄럽다 해도 그것 말곤 다른 모양은 떠올리지 못했을뿐더러 어차피 고백을 하기로 작정한 마당에 그건 감수해야 할 일인 것이다.



나는 초콜릿에 딱 맞는 크기로 포장지를 잘라냈다. 작게 잘린 포장지로 나의 초콜릿들을 하나하나 소중히 감쌌다. 잘 오므려진 초콜릿의 양 귀퉁이는 리본으로 묶었다. 초콜릿이 녹지 않도록 손끝만으로 조심스레 잡아가면서. 그렇게 새 옷을 입은 초콜릿들을 하나씩 철사에 엮었다.



알알이 맺힌 초콜릿들은 처음으로 세상밖으로 나온 내 마음이었다. 이렇게 형태를 갖춘 이상 마음속에만 존재하던 무형의 관념이 아닌 분명히 실재하는 의미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한껏 포장을 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맨몸을 내보인 듯 부끄러웠다. 내가 이걸 정말 줄 수 있을까.



긴 초콜릿 꾸러미를 손으로 매만져 하트 모양을 완성했다.

가슴속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와 들락날락했고, 금세라도 몸이 둥실 떠오를 것 만 같았다. 이 초콜릿을 받아줄 그 애를 떠올리면서 귓가가 뜨거워지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SH네 집에서 그토록 정성을 다해 초콜릿을 만들던 나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져있는 여자였다. 어른의 사랑과는 깊이가 다를지 몰라도, 애틋함, 그 마음 앞에 속수무바카라인 것, 그리고 온 정성을 다하고 싶은 것은 매 한 가지일 것이다.



이윽고 졸업식 날이 되었다. 우리는 비장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각자의 첫사랑에게 고백을 했다. 말 한마디 없이 초콜릿 상자와 편지를 건네준 게 전부지만, 어쨌든 고백이었다.



내 딸아이도 곧 고백을 할 것만 같다. 워낙 활발해서 고백을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용기가 필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용기를 내게 할 만큼 맘속에 가득 찬 친구가 누구일지 몹시 궁금하다.



엄마도 그 나이 때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는 걸 딸아이가 안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이후에 어떻게 됐냐고 물으면 그럼 또 뭐라고 해야 할까. 안 되겠다. 아직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을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