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낯선 룸메이트
기숙사 추첨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30프로의 확률이었으니 붙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번엔 꼭 기숙사가 되어 방을 같이 쓰자했던 친한 친구는 당첨이 되었다. 결과를 받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엄마가 어떤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기숙사 추첨날에 부모님들이 모두 오셔야 했기에 아마도 누군가의 엄마일 것이다. 어쨌든 오늘 처음 본 자리인 건데 역시 엄마의 친화력은 알아줘야 한다.
그 아주머니는 같은 과 친구 L의 엄마였다. 2년 동안 인사정도만 할 뿐, 별다른 말을 나눠 본 기억이 없는 친구였다. 각각 다른 친구 무리에 속해있기도 했고, 멀리서 보아도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부류였다.
그녀는 매우 성실했다. 강의실에 늘 먼저 도착해 있었고 리포트는 항상 선두로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발표하는 걸 좋아했지만 평소엔 또 말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안경을 썼고, 머리는 늘 포니테일, 옷은 티셔츠에 청바지차림이었다. 놀거나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자기 일에 충실했고, 뭐든지 묵묵하게 해 나가는 타입 같았다.
나는 무조건 풀어헤친 긴 머리에 어설프게나마 화장은 꼭 했으며 바지보단 주로 스커트나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한껏 신나게 멋 부리기 바빴던 것이다. 강의실에 미리 가서 수업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리포트는 늦지 않게만 제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강의가 끝나면 우르르 몰려가 밥을 먹고 도넛을 사 먹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길거리를 쏘다니며 잡다한 소품과 액세서리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으며 약속이 많아서 늘 바빴다.
그녀는 크리스천이었다. 기독교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한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종교가 없었다.
그녀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이, 나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고, 인연이 될만한 연결 고리 또한 없었다. 딱히 싫어한 것도 일부러 배제한 것도 아닌, 알고자 필요성을 못 느끼는 관계. 같은 공간에서 매일 같은 수업을 들었어도 그럴 수 있는 관계가 있는 법이다.
돌연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어. 다 해결됐어!"
"뭐가?"
"여기 L 이랑 같이 자취집 구하기로 했어"
??
"이 분이 L 엄마야! 인사해 "
등 떠밀려 인사는 했지만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L도 옆에서 조금 전 알게 된 듯싶었다. 그래도 나보단 금세 평점심을 찾았는지 나를 향해 멋쩍게 웃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의기투합했다. 그 길로 학교에서 나와 학교 근방을 돌아보자 했다. 당시만 해도 교차로나 벼룩시장 따위의 생활소식지의 정보력은 쓸만했다. 몇몇 집에 연락을 해보고 괜찮은 조건의 집을 바로 찾아 나섰다.
그 집은 학교 후문에서 10분 거리였다. 후문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주택가로 접어드는 골목길이 하나 나왔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대문 대여섯 개를 지나쳐 가면 막다른 곳에 다다르는데 거기에 초록색 대문의 그 집이 있었다. 폭이 좁은 계단을 서너 칸 올라가야 대문을 열 수 있었다. 대문 밖으로 비죽 나온 나뭇가지들이 어찌나 많은지 나무가 있는 정원 풍경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대문을 열자마자 마당이 한눈에 바라보였다. 너른 마당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로 그득 채워져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당 오른편에 반듯하고 꽤 넓은 화단으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꽃은커녕 풀 한 포기 없이 텅 비어 있었지만, 붉은 벽돌들이 경계를 따라 사뿐사뿐 놓여 에워싸고 있는 본새가 영락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호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왼쪽으로는 좁고 기다란 장독대가 있었고, 뒤뜰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대야만 하나 놓아도 꽉 차는 아주 작은 수돗가가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이 담을 따라 이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무엇 하나 허투루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간결하고 자연스러웠다. 아직 겨울이라 푸른 기 하나 없이 심심한 풍경이었지만, 이 단정한 마당은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사람의 손길이 깃든 사물에 정이 가는 것은 나만의 취향만은 아닐 것이다. 마치 매만져진 사물에 스며든 누군가의 애정 어린 마음이 내게 옮겨지기라도 하듯 나는 그 마당에 정이 들어버렸다.
주인집 어른들이 사시는 안채는 정면에 있었다. 그 왼편으로 돌아가면 작은 현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세를 주기 위해 한 채의 집에 두 개의 현관문을 만들어 놓은 구조였다. 나중에 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지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안채의 일부였던 큰 방 하나를 뚝 떼어 방문을 막고 도배를 한 다음 이 방에 딸린 간이주방과 욕실을 새로 만든 것이었다.
방은 둘이 쓰기에 충분했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란 창이 있어 아까 마당이 훤히 내다보였다. 반대편엔 상하부장을 단출하게 갖춘 작은 싱크대와 수전이 달린 간이주방이 있었다. 옆에 냉장고를 두는 공간을 제외하면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지만 어차피 대단한 요리를 할 능력도 없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L 은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도 이때 이 작은 주방과 좁은 조리대를 보고 속으로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나는 방에 큰 관심이 없었는지 내 기억은 그 작은 싱크대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창문으로 보이는 마당의 풍경으로 장면이 뛰어 넘어가는 것이다.
엄마들은 방을 둘러보는 내내 매우 흡족하신 얼굴이었다. 학생들을 위한 자취방으론 손색이 없다고, 둘이 쓰기 딱이라고 입모아 말씀하셨다.
기숙사에 떨어진 일도, 뜻밖에 동기와 룸메이트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취집을 구하려고 동네를 돌면서 그 사실들이 내내 탐탁지 않아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대문 앞 계단에 오르면서, 비죽 얼굴을 내민 무성한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주인어른들의 손길이 닿은 마당의 온기를 느끼면서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머물 공간은 마당이 아니라 방이니까 방을 더 꼼꼼하게 봤어야 하는 건데, 한편으론 스물두 살의 내가 방을 본다 한들 뭘 봤으려나 싶다. 변기물은 잘 내려가는지, 웃풍이 없는지, 곰팡이가 피진 않는지 따위를 살필 능력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런 것들은 같이 간 엄마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저 '예쁜 마당이 있는 집'이라는 로맨틱한 기대와 상상에 부합하는 보금자리를 보며 마냥 만족해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마당 있는 집에서 낯선 룸메이트와 함께 사계절을 지내게 되었다. 너무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기어코 하찮지만 말갛고 예쁜 구석을 찾아내는 것은,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장점이다.
때로는 그 하찮고 예쁜 것이 저 혼자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서 오히려 다른 섭섭한 것들을 사소하게 만들 때가 있는데 그때가 딱 그랬다.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집이지만 기대가 부풀어져 모든 것이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다. 조경, 연못, 분수 같은 것들이 있는 고급스러운 정원도 아니고, 하물며 그 흔한 파라솔과 티테이블이나 바비큐 같은 것도 없는데 흠뻑 빠졌다는 게 웃음이 난다. 그럴 수 있는 그때의 내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