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1학년 여름 방학 동안 알바를 하게 된 곳은 작은 문구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트박스 같은 곳이었는데,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소매점인 셈이었다. 문구, 소품, 캐릭터 용품들을 파는, 작지만 이것저것 다 있는 그런 잡화점이랄까.
처음 면접을 보러 갔던 날, 나는 그녀 역시 아르바이트생인 줄 알았다. 사장님이란 으레 우리 부모님처럼 나이가 지긋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물일곱의 사장님은 나를 보더니 우리 같이 잘해보자 하셨다.
어느새 사장님이랑 친해졌다. 사장님은 키가 컸는데 나도 키가 커서 너무 좋다고 했다. 사장님은 오전 내내 나한테 말을 시키셨다. 일 얘기는 물론이고 자기가 살아온 얘기,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많이 해주었다. 자기를 언니처럼 대하라고 했고 동생이 없으니 나보고 자기 동생 하자고도 했다.
어느 날 사장님이 이틀 정도 가게문을 닫고 바다에 같이 놀러 가는 게 어떻겠냐 했다. 그날도 일한 걸로 쳐주겠다고. 와 바다라니. 그리고 일을 안 해도 된다니. 나로서는 너무 신나는 제안이었다.
여행 당일 아침, 가게로 나왔는데 웬 남자분이 와 있었다. 오늘 가게 문 닫았는데 이 분은 왜 오신 거지? 언니가 말했다.
"내 친구야. 인사해. 같이 가도 되지? 엄청 착해."
"처음 뵙네요. 이 분이 그 알바동생이시구나. "
둘이서만 가는 줄 알고 있던 터라 좀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주최한 여행도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전 안 갈게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릉으로 가는 길은 당시 대관령을 넘어가는 구불구불 산길이었다. 멀미가 나서 괜히 왔다 싶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편하지도 않은 사람과 이런 여행을 오다니. 사장님하고 여행 오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게다가 낯선 사람까지 같이 오다니. 울렁대서 자다 깨다 하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하며 겨우 강릉에 도착했다.
사장님의 친구분은 사장님이 말한 대로 정말 착했다. 트렁크에 물, 과자, 과일, 맥주, 다음날 아침 차릴 식재료까지 미리 장 봐온 것들이 실려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우리 보고 들어가 쉬고 있으라 했고, 짐을 혼자서 나르고 풀었다. 목이 마르다 하면 물을 꺼내주고 쌀쌀하다고 하면 옷을 가져다주었다. 경포대에 파라솔을 빌려서 놀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게 없는지 내내 찾는 사람 같았다. 엄연히 말하면 사장님에게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한참 놀다가 출출하다고 하자 그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곧장 일어나서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며 횟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잠자리에 들면서 사장님에게 물었다
저분, 언니 남자친구예요?
아니, 그냥 친구.
근데 왜 여기 같이 오신 거예요?
ㅎㅎ 쟤가 나 좋아해. 같이 오고 싶대서 가자고 했지.
혹시 사귀실 거예요?
아~~니. 그냥 친한 친구야.
......
연두야 잘해준다고 다 사귀는 건 아니야. 나중에 너도 다 알 게 될 거야. 이 언니는 이상형이 따로 있단다.
사귀어야 한다는 뜻으로 물어본 말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궁금했던 거였다.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보다 언닌데 설마 그런 걸 모를 리가 있을까.
그런데 친구분은 사장님의 이런 마음을 알까. 눈치 없는 내가 봐도 그분은 사장님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내가 아직 어려서 뭔가를 모르는 걸까. 나이가 더 들면 이런 관계도 자연스러운 게 되는 것일까.
전날 밤 맥주를 마시고 잔 탓인지 속이 좀 안 좋았는데 깨어보니 황태콩나물국이 차려져 있었다. 진한 황태 냄새에 벌써부터 속이 달래지는 것 같았다. 단연 그분이 먼저 일어나서 준비해 둔 아침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아침을 먹었다. 흰쌀밥에 황탯국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다니.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장님의 얼굴과 그 친구분의 얼굴을 내내 번갈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걸 먹어도 되는 건지 싶었다. 그들의 관계에 내가 불편해할 이유가 없는 건데 편치 않았다. 두 사람, 각각의 마음을 안 이상 아무렇지 않기가 어려웠다. 빨리 이 여행을 끝내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어김없이 멀미가 시작되었다. 잠을 청했지만 드문드문 이어지는 둘의 대화가 자꾸만 귀에 들어왔다. 갈 땐 몰랐는데 이젠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언제 마음을 알아줄 거냐는 뉘앙스의 남자의 말, 그리고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여자의 대답. 다음엔 다른데 여행 가자는 여자의 말, 좋다고 하는 남자의 대답. 차라리 강릉에 갈 때처럼 잠이 들어버리면 좋으련만. 자는 척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잠은 오지 않고 속만 부대꼈다.
나이가 들수록 신념이 확고해진다고들 하는데 어떨 때 보면 어릴수록 그 틀이 더 견고하기도 한 것 같다. 몸만 성인이 된 것뿐인데 마치 세상을 다 아는 어른이나 된 듯 아무 데나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불편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