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예매를 평생 말할 수 있는 이유

미혹의 순간

by연두


그럼 예매해

네? 제가요?



난 한 번도 영화를 예매해 본 적이 없었다. 다소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누군가가 예매를 대신해 주었다. 물론 직접 가서 발권하는 경우도 많았다. 근처 극장엔 언제 가도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예매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영화가 재밌다더라 혹은 개봉했다더라는 얘기가 나오면 주로 남자들이 나서서 예매를 하겠다고 했다. 친구건 지인이건 남자들이 착해서였는지 그들은 영화예매라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당시 나는 그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었는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무심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더라도 몇 번이라도 그런 일이 있고 보니 자연스레 내가 나서서 예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아닌가 싶다. 그렇다한들 참 부끄럽기 그지없다. 역시 무언가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문제의식에서 둔감해지니 무서운 일이다.




그랬는데. 나보고 예매를 하라니. 무슨 영화였는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크게 보고 싶다거나 기대가 되는 영화도 아니었다.



이 사람 뭐야. 어이없네



메가박스 홈페이지를 열어 회원가입과 인증, 로그인 등의 귀찮은 절차를 하나씩 해나갔다. 별거 아니었다. 언젠가 예매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해보게 될 줄은 몰랐다. 웃음이 피식. 뭐 누가 하면 어떤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으로 둘이 밖에서 만나기로 한 날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는 우리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영화가 시작하기 2시간쯤 전이었다. 극장 근처에 파스타집을 예약해 놨다 했다. 내가 영화를 보여주니 자기가 맛있는 걸 사주는 거랬다. 가게는 생각보다 근사했다. 먹어본 적 없는 신기한 파스타가 나왔다. 조그만 조개껍데기같이 생긴 파스타면이었는데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콘길리에였으리라. 정확한 음식 이름은 모르지만 맛과 생김새를 떠올려보면 클램 차우더에 파스타면이 들어있는 듯한 거였다. 하얀 우윳빛 크림소스를 듬뿍 머금은 조개모양 파스타를 하나하나 집어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쫄깃함 사이에 크림소스가 즙처럼 스며나왔다. 입속이 황홀했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파스타를 얻어먹었으니 팝콘은 내가 사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파스타를 실컷 먹고서 팝콘을 먹자고 하면 너무 먹보처럼 보이지 않을까. 망설여졌다. 평소 영화 볼 때 팝콘은 캐러멜, 음료는 파인애플 환타, 그리고 나초까지가 국룰인데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팝콘 먹을까?

그.. 그럴까요?

작은 거 하나 먹자. 어떤 거 먹을래?

그럼 전 캐러멜팝콘이요.



영화를 예매해 준 게 고마워서 특별히 팝콘도 자기가 산다 했다. 그래도 양심껏 나초까진 차마 말하지 않았다.



극장에 불이 꺼지고 의자에 기대앉는데 머리에 꽂힌 집게핀이 닿아서 배겼다. 반머리를 하느라 꽂아놓은 집게핀이었다. 다시 고쳐서 꽂아봐도 영 불편했다. 결국 머리를 풀고 핀을 빼버렸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툭 펼쳐 보이며 내 손에 들고 있던 집게핀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홀린 듯 그의 손바닥 위에 집게핀을 올려놓았다. 그는 내 집게핀을 꼭 쥔 채 가져갔다. 잠시 만지작 거리더니 자신의 셔츠 한쪽 옷깃에 꽂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시 스크린에 집중하는 얼굴.



이 사람 진짜 뭐지?




난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이렇게 의심스러운 호의에 눈이 머는 사람이 아니다. 무서운 사람이네. 조심해야겠다 생각했다. 천연덕스럽게 예매를 하라 하질 않나. 맛있는 파스타집은 왜 데려가는 거며, 특별히 팝콘까지 사주고, 내 집게핀을 왜 자기 옷에 꽂는 건데? 나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닌데.




속수무바카라이었다. 무언가 급격히 허물어졌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조금씩 찰방찰방거렸지만 풍덩 빠지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어리숙한 20대에 그게 자상함인걸로 착각한 탓도 있겠지만, 실은 무신경한데도 어쩌다 별 뜻 없이 하는 츤데레 같은 행동에 마음이 흔들린 건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살뜰하게 계속 챙기는 것보다 불현듯 툭 마음을 쓰는 모습에 매력을 느끼곤 했다. 내 주변에 머무르며 꾸준히 나를 살피거나 언제나 나를 향해있는 시선은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고 성가시기까지 했다. 일관되게 자상한 편이 일상에 훨씬 이롭고 삶을 편안하게 할 텐데. 결혼은 일상이고 생활이라 그래야 하는 건데. 그걸 알리 없었다.





언젠가 그에게 물었다. 그때 나한테 왜 예매하라고 시켰느냐고. 명색이 첫 데이트였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나 그때 예매 처음 해본 거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가관이다. 자기도 내가 진짜 예매할 줄 몰랐다나. 솔직히 내가 어쩌나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했다. 나를 떠봤다는 말이란 건가?



그때 우리는 이제 막 가까워지던 사이였다. 통화나 문자는 자주 했지만 명분 없이 둘이서만 따로 만나자고 하기엔 조심스러운 관계랄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기까지 그 말을 언급하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다 개봉한 영화 얘기가 나왔고, 네가 예매하면 내가 같이 가서 보겠다는 식의 다소 비겁한 방식으로 그가 운을 뗐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덜컥 예매를 했단다. 그래서 바로 파스타집을 알아봤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었으며, 주말에 입을 셔츠를 하나 샀고, 부랴부랴 세차를 했다고.



그럼 내가 예매를 안 했더라면?

뭐 어쩔 수 없는거지.

헐



지금도 늘 그런 식이다. 그는 애초에 무심하고 별 말을 하지 않고 시큰둥하고 있다가 문득 자기식대로 챙겨주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다. 그 문득이 아주 드문드문이라서 섭섭할 때가 종종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날의 회상이 좋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갑자기 뺏기던 그 순간이 현실 같지 않아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은 따로 노는 혼란과 부조화가 싫지 않아서, 그리고 대상과는 별개로 풍덩 빠지는 미혹의 순간이 꽤 달콤했기 때문이리라.




그날은 누군가를 위해서 처음으로 영화를 예매한 날이기도 하다. 그게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누구 때문에 영화를 처음으로 예매해봤다'고 평생 떠들어댈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전히 너무 좋아하는 클램 차우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