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그때 만난 어른

by연두






캐리어를 끌고 배정받은 방 앞에 섰다. 방문 중앙에 낯선 이름과 내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아빠 온라인 게임에서 자녀들을 위해 제공되는 기숙사였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깔끔하고 제법 널찍한 2인 1실이었다. 한쪽 바카라상엔 바카라이 서너 권 꽂혀있고, 침대 위엔 이불이 반듯하게 깔려있었다. 마침 같은 학교, 같은 과, 신입생 동기가 있어 같은 방을 배정해 주었다고 했다.



반대편 텅 빈 침대와 바카라상이 내 자리였다. 뭘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짐을 하나씩 풀면서 슬쩍슬쩍 옆자리를 건너보았다. 조그만 곰인형 하나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바카라상 전면에 시간표가 붙어있고. 필통 하나, 노트 몇 권, 키대로 줄지어있는 화장품들도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바카라상 주인이 들어왔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애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너구나. 너도 oo학번이라고 들었어 나도야. 잘 지내보자!"


높은 톤의 목소리, 명랑한 그녀. 꽤나 세련된 아이라 생각이 들었다. 낯을 가리고 말주변도 없는 나는 분명 어리숙하게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석식을 먹고 자기 바카라상 앞에 앉아 띄엄띄엄 대화를 했다. 남은 짐들을 정리하며 어디에 사는지, 이 학교에 어떻게 지원하게 되었는지 등을 말했다. 그녀의 집은 강릉이었다. '강여고'를 나왔는데 혹시 아느냐고 했다. 강릉에 있는 여고 중에서 제일 센 학교라 했다. 난 강릉이라면 경포대에 딱 한번 가본 적이 있어서 바다가 떠올랐다. 우와 바닷가 살아서 좋겠다 했더니 그녀는 집도, 학교도 바닷가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우리 모레 아침에 무조건 8시 버스 타야 돼. 학교까지 30분 걸리는데, 다음 버스 8시 20분에 와서 그건 안돼......

여기서 7시 45분엔 나가야 돼. 내가 아까 나가봤어. 문구점 앞이 버스정류장인데 여기서 딱 십분 걸리더라."



모레가 첫 등교였다. 그녀는 미리 버스 시간표는 물론이고 버스 정류장 위치와 거기까지 도보로 걸리는 시간까지 알아본 것이었다.



"청소는 번갈아서 하자. 이틀에 한 번씩이면 되겠지? 그리고 욕실용품은 저기다 두자. 혹시 물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방에 갖고 들어오지 않기. 그리고 너 폰 있으면 번호 알려줘."



현관 앞 신발장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기 폰번호를 알려주며 알아두라 했다. 난 아직 폰이 없었다. 삐삐번호를 알려줬다. 조금 있다가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뒤돌아 통화했지만 어쩔 수 없이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얘기들, 언뜻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서로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끊고 그녀가 말했다.

"남자친구야. 얘는 H대 갔어. 우린 주말에만 만날 것 같아."



어떻게 벌써 남친이 있는 건지.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증명사진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하얗고 약간 각진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애가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착해 보였다.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 늘 같은 시간에 씻었고, 정확한 시간에 불을 껐으며 잠을 잤다. 살찐다고 밤에 뭔가를 먹는 법이 없었고, 화장을 제법 어른처럼 잘했으며, 남자친구가 있었다. 꼼꼼하고 다소 까다로운 그녀, 소지품을 잘 챙기는 그녀, 용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그녀. 우린 둘 다 스무 살이었지만 그녀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고 어른스러웠다. 두세 살 많은 언니라 했어도 믿을 것 같았다. 19년을 살면서 이런 친구는 본 적이 없었다.



나보고 점심을 왜 내 돈으로 사 먹냐 했다.

"동방에 가서 선배들에게 밥사달라 그래. 그럼 다 사주던데? 1학년때 누가 자기 돈으로 밥 먹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늘 반박할 수가 없었다. 듣고 있으면 다 맞는 말 같았다. 한편으론 그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밥을 사달래려고 작정하고 선배를 찾아가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우연히 만나거나 먼저 사준다고 한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아침 7시면 기숙사엔 기상 라디오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큰소리로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 나왔는데 아무리 잠귀가 어두운 나도 깜짝 놀라서 단번에 눈이 떠졌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이불속에서 좀 꼼지락대다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 그녀는 한번에 벌떡 일어나 씻으러 나갔다. 그러면서 나를 채근하는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 우리 8시 버스 타야 돼."

"알아, 나도 안다구."



우리는 학교에서 각자 친한 친구가 생겼다. 처음엔 붙어 다녔지만 좀 더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기다 보니 자연스레 같이 다닐 일이 없어졌다. 서로 각자의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따로 집에 가는 일도 많았다. 그러다 등교도 각자 했다. 동아리도, 축제도, 시험기간에도 따로였다.



어느 날,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떨어져 있으니 마음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내가 봐도 그래 보였다. 아침, 저녁으로 통화하던 게 한 번으로 줄더니 전화가 없는 날도 많아졌다. 현실적으로 이 남자는 아니라고 했다. 미래가 안 보인다나? 현실적이란 말은 내게 알쏭달쏭했다. 그보다 그토록 매일 다정했던 사이가 이렇게 끝나버릴 수 있다니. 충격이었다.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내심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후 그녀는 동아리 의대 선배와 커플이 되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를 직접 본 적도 없고, 통화로 인사 몇 번에 셋이서 가벼운 얘기를 나눈 게 전부였지만, 자꾸만 사진 속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반년도 되지 않아 기숙사를 나갔다. 10시인 통금시간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 했다. 사실 동아리 모임, 조모임, 리포트, 친구들과 놀다가도 9시쯤 되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눈치를 보다가 일어나는 일이, 나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는 8시에 버스를 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1교시 수업이 줄어들면서 그렇게 일찍 버스를 탈 필요가 없었다. 새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문구점 앞 버스정류장에 가서 버스시간표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본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었다. 8시 반에 버스가 있었다. 그러면 8시 15분에 기숙사에서 나오면 되겠구나. 엄청난 사실이라도 깨달은 듯 뿌듯했다.




아침마다 라디오 소리에 눈이 떠졌지만 여전히 이불속 내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녀처럼 단박에 일어나서 수건을 들고 경쾌하게 씻으러 가는 게 나는 왜 잘 안 되는 걸까.



"뭐 해? 이제부터 8시 20분에 나가야 돼. 서둘러!"



가끔은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 피식 웃음이 났고, 나도 모르게 마치 습관이라도 밴 듯 몸이 일으켜졌다.



나는 한참 어린애였다. 매사에 까다롭고 완벽해 보이던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은 갑갑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에게서 배운 것들이 적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내게 이틀마다 쓸고 닦는 청소습관을 만들어주고, 아침마다 모닝콜을 해주었으며, 나의 게으름에 적절한 자극이 되어주었다.




세탁기를 사용해 본 적도 없고 휴지통을 비울줄도 모르던 미성숙했던 내가 그녀 덕분에 조금 사람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삶에 신념은커녕 일상생활에 기본기도 탑재돼 있지 않은, 여전히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내게, 그녀는 한참 어른이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게 된 그때,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동기들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면 귀가 쫑긋해진다. 이젠 그녀의 폰번호가 없어 연락할 수도 그럴 일도 없지만, 어딘가에서 스무 살 그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잘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