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경계에 서
이번 출장은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일정이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생기면 공항에서 보통 나는 루틴처럼 어떤 영화들을 플레이한다. 공항이 등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국적 풍경을 담거나, 주인공 역시도 여행을 하는 로드무비이거나.
공항에서 찾는 영화들을 늘어놓고 보니 공통점이 있다.
소피아 코폴라의 <Lost in Translation>, 조지 클루니가 나왔던 <Up in the Air>, 양조위의 <화양연화>, 최근엔 <센티멘탈 밸류>.
인간의 고독을 다루되, 그것이 사랑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영화들 속 사람들에게는 이미 가까운 관계가 존재한다. 배우자가 있고, 가족이 있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구멍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반드시 나를 잘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배우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친구가 알아볼 수도 있고, 잠시 스쳐가는 낯선 사람이 내 고민을 가장 성심성의껏 듣기도 한다.
<Lost in Translation>의 한국 제목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제목이 얼마나 얄팍한 요약인지 알게 된다. 원제가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통역의 실패 그 자체다. 도쿄의 호텔에서 낯선 언어들에 둘러싸인 채 잠들지 못하는 두 사람은 통역될 수 없는 환경과 관계들에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저 그 상황을 견딜 뿐. 영화의 마지막, 밥 해리스가 샬롯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지만 관객은 무슨 말인지 들을 수 없다. 그 장면이 어쩌면 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여운이 남게 된다. 그 광활한 침묵을 고작 "사랑"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는 순간 영화가 하려던 모든 말들이 얄팍한 불륜 서사로 바뀐다. 비워 둘 자리를 서둘러 단어를 밀어 넣어 경솔하게 채워 넣은 사례다.
<Up in the Air>의 라이언 빙엄은 해고를 대신 통보하러 다니는 본업 외에도 기업의 의뢰가 있을 때 Empty backpack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일 년의 대부분을 공항과 호텔에서 보내고, 밀리언마일러를 목표로 산다. 그의 강연에서는 당신의 배낭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묻고, 관계와 소유를 하나씩 내려놓으라고 조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말미에서 그 관계와 소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지클루니의 굽은 등을 보면서, 나는 30대의 대부분을 "고독"에 대한 탐구로 보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의 고독을 알아보는 순간, 그 알아봄이 삶의 전부를 해결하지 않는다. 관계를 완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 두 사람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설명하지 못했던 어떤 부분이 실재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잠시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알아본 모든 사람을 소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이해를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고 내면의 힘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아마도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성취 혹은 일탈보다 더 큰 의미의 성숙에 가깝다.
내가 이 영화들을 하필 공항에서 떠올린다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 공항은 아무도 나를 알아볼 필요가 없는 곳이다. 나는 늘 주변인, 혹은 경계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런 삶을 동경했다. 공항이라는 경계, 국적의 경계, 언제나 선 위를 밟고 서서 이쪽으로 넘어갈까 저쪽으로 걸어볼까를 고민하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결정하지 않고 유예하는 시간을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어쩌면 그 선 위에 서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정 제출 과제를 11시 59분에 올린다거나, 발표 마지막 당일까지 슬라이드를 고친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렇다. 결정을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상황의 어쩔 수 없음으로 내맡기고는 나중에 그때 시간이 없었어. 별 수 없었지. 혹은 그래도 그 와중에 훌륭했지. 양쪽 다 다소 비겁한 변명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를 만드는 것이다.
대학 시절 나는 매년 봄이면 전주로, 가을이면 부산으로 영화제를 떠나는 시네필이었다. 무슨 영화를 볼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안일한 시네필이었지만, 그렇게 본 영화들의 절반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영화제 분위기가 마냥 좋던 스물세 살 봄이었다. 고딩 때부터 지갑에 품고 다니던 최명희의 『혼불』 에서 옮겨 적은 한 구절이 있었다. 불꽃같던 첫사랑에 실패한 뒤, 나는 전주의 최명희문학관 기와지붕 밑에 그 구절을 두고 왔다. 그 구절을 더는 믿지 않기로 하면서.
그 이후로 나는 먼 길 오는 이를 기다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점점 타인의 온기로 나의 수족냉증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부단히 노력하고 시도했지만 늘 실패했다. 오래도록 그것을 나의 실패로 생각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채울 수 있는 주체는 나뿐. 나를 채우는 것과 나의 빈 곳을 그대로 알아보는 것은 다르다. 나는 앞의 것을 구하면서 뒤의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와서 메울 수 있는 구멍도 아니다.
나의 이런 냉소 섞인 비겁함에 대해 이제 하나둘 주변에서 말을 얹는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해라,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르는 매운맛을 경험하라. 그것이 성숙한 인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나의 결정을 재촉한다. 재촉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쪽 혹은 저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고, 넘어본 사람만이 넘으라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다만 나는 이제 그들이 말하는 비겁함과 정의의 오류 자체를 알고 있다.
결정을 유예하는 것과 소유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은 밖에서 보면 같은 모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