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 리뷰]
《기생충》과 《어쩔수가없다》의 지독한 파편 위에서, 이창동이 기어코 건져 올린 ‘가능한 사랑’
2026년 가을, 대한민국 극장가는 세 거장의 세계관이 격렬하게 부딪치고 섞이는 기묘한 스크린적 체험을 목격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을 보고 나오며, 많은 관객이 자연스럽게 봉준호의 《기생충》과 곧 당도할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세 영화는 계급의 격차, 실직, 그리고 가장의 벼랑 끝 현실이라는 동시대적 절망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지독하리만치 닮은 지옥도 속에서, 영화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감독들의 ‘시선(카메라)’에 있다.
봉준호의 시선은 냉철한 관찰자다. 《기생충》의 카메라는 철저히 수직적이다. 대저택에서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집요하게 비추며 인물들이 결코 넘지 못할 ‘선’을 구도적으로 박제한다. 자본이 부재한 하층민들의 연대는 불가능하며, 약자가 약자를 짓밟는 구조적 덫을 현미경처럼 차갑게 포착할 뿐이다. 그곳엔 오직 ‘불가능해진 사랑’의 냉소만 남는다.
박찬욱의 시선은 매혹적인 해부학자다. 《어쩔수가없다》 속 카메라는 생존을 위해 경쟁자들을 처단해야 하는 평범한 가장의 폭주를 감각적이고 연극적인 미장센으로 세공한다. "이 잔인하고 웃픈 아이러니를 똑바로 봐,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듯, 관객의 눈을 막다른 길에 몰린 인간의 광기에 강제로 밀착시킨다.
《가능한 사랑》은 앞선 두 거장이 파헤친 계급적 사투와 모멸감의 정서를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자본가 상우(조인성)의 화려한 빌라와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의 거친 현실이 충돌하는 전반부는 《기생충》의 숨 막히는 선 긋기를 닮았고, 욕망이 뒤엉키는 중반 이후는 《어쩔수가없다》처럼 독한 긴장감을 뿜어낸다.
그러나 이창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부유한 예술가 부부(조인성·조여정)의 카메라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시선의 윤리’를 심판대에 올린다.
이창동의 카메라는 화려한 워킹 대신 164분 동안 인물들의 위선과 냄새를 거울처럼 집요하게 응시한다. 하층민의 분노마저 자본가의 ‘놀이’로 희화화되는 순간의 모멸감을 관객이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까지 가만히 쳐다본다. 그리고 렌즈를 슬그머니 돌려 관객에게 묻는다. “너희는 극장 의자에 앉아 이 고통을 어떤 시선으로 소비하고 있느냐”라고.
영화의 마지막, 온갖 파국과 계급의 장벽 속에서 철저히 무너져 내린 인물들은 어두운 그믐달 아래 홀로 외롭게 선다. 냉소나 조롱으로 끝날 것 같던 스크린은, 그러나 마침내 밝은 보름달을 함께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을 포착하며 멈춘다.
이창동 감독이 이 지독한 영화의 제목을 역설적이게도 《가능한 사랑》이라 명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과 유대가 완전히 불가능해진 벼랑 끝 자본주의 슬롯(기생충과 어쩔수가없다의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매달려야 할 실낱같은 ‘1%의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같은 달을 응시하는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연대의 가능성을 믿고 싶다는 창작자의 슬프고도 묵직한 구원의 의지.
세 거장의 시선이 절묘하게 비벼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친절한 해답 대신 가장 무거운 숙제를 던진 채 막을 내린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진짜 사랑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