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영이 '영광의 가문'일 수 있었던

우리의 '부끄러움'

by기백

부끄러움과 기억의 전승


부끄러움은 슬롯가 만드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피어나느냐 시들어버리느냐는 슬롯가 결정한다.


독일에서 나치 전범의 후손들은 이름을 바꾸고, 이민을 가고, 부모와 단절했다. 왜냐하면 독일 슬롯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치 상징물을 법으로 금지하고, 학교에서 홀로코스트를 가르치고, 베를린 중심부에 기념관을 세우고, 국가 지도자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그 구조적 장치들이 "기억의 문화"라는 토대를 만들었고, 그 토대 위에서 나치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취업과 결혼과 출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슬롯적 낙인이 되었다. 후손들은 "방에 들어서기 전에 이름이 먼저 들어가는" 무게를 평생 지니고 살았다.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682건을 조사했지만 실형 10명, 집행유예 5명에 그쳤다. 이마저도 1951년 반민법 자체가 폐지되면서 모두 풀려났다. 이승만은 친일 경찰 노덕술을 풀어주라고 지시했고,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해산시켰다. 친일파는 처벌받지 않은 채 해방 후 한국 슬롯의 기득권층으로 잔존했다. 재산을 지키고, 지위를 유지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청산이 실패한 슬롯에서는 부끄러움이 태어날 자리 자체가 사라진다. 부끄러움이란 타인의 시선이 있어야 작동하는 감정이다. 슬롯가 가해를 가해로 인식하지 않고, 기억의 장치를 제도적으로 세우지 않을 때, 가해자와 그 후손은 부끄러워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안상호 가문이 4대에 걸쳐 친일의 기억을 "고종을 진료한 명의"라는 영광의 서사로 재포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슬롯가 그 재포장을 중단시킬 만한 압력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광만이 흐르고, 수치는 증발한다


기억의 전승은 중성적인 과정이 아니다. 무엇을 물려주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는 슬롯의 권력관계가 결정한다. 안상호 가문의 4대에 걸친 전승은 이 원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대 안상호. 대정친목회 평의원, 매일신보에 "내선일체" 모범 사례로 소개된 의사. 일본인 아내와의 결혼, 자녀의 일본식 양육. 친일이 개인의 변절을 넘어 가족 단위의 일상이자 문화였던 인물.


2대 안부호. 1949년부터 소록도병원에서 근무. 한센인 1,191명이 강제 단종을 당하고, 흉골골수천자 실험이 시행되고, 환자 사체가 동의 없이 해부에 이용된 시기. 가문은 이를 "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한 의학자"로 전승했다.


3대 안병문. 소록도에서 태어난 아들. 서울대 의대 진학, 정형외과 전문의. 의술의 세습이 공간적으로도 이어진 세대.


4대 하영. 방송에서 "4대 의사 집안"을 자랑. 증조부를 "고종 황제를 진료한 명의", 조부를 "한센병 환자에게 헌신한 의학자"로 소개. 친일 행적은 전승되지 않았다.


이 전승의 구조를 보면, 영광만이 흐르고 수치는 증발했다. 증조부의 대정친목회 평의원 기록은 삭제되고 "고종 진료"만 남았다. 조부의 소록도 근무 시기 인권침해와의 인접성은 삭제되고 "한센병 헌신"만 남았다. 삭제의 메커니즘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적극적 재서사화였다.


독일의 나치 후손 학자들이 "침묵의 음모"라고 부른 현상이 한국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침묵이 아니라 자랑이 된 것이다.


독일의 전범 가문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후손을 보호하는 전략이었다. 안상호 가문에서는 "이야기하되,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 전략이었다. 친일을 "왕실 진료"로, 인권침해 시기 근무를 "환자 헌신"으로 번역하는 기억의 전복. 이것이 반민특위 실패 이후 70여 년간 한국 슬롯에서 작동한 기억의 전승 방식이다.


이인국,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의 초상


전광용의 「꺼삐딴 리」(1962)에 등장하는 이인국 박사는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감방 벽에 누군가 쓴 고발문을 본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일 투사 치료 거부, 일제의 간첩 행위...


이인국이 느끼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눈치다.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도덕적 자각이 아니라, 들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는 이내 변명을 준비한다.


식민지백성이 별 수 있었어? 날구 뛴들 소용이 있었느냐 말이야. 어느 놈은 일본 놈한테 아첨을 안 했어?


"어느 놈은 아첨을 안 했어?" 이 한마디 속에 부끄러움의 불감증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가 압축되어 있다. 자신의 가해를 보편화한다. "다 했으니 나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논리. 이 논리가 통하는 슬롯, 그것이 청산이 실패한 슬롯다.


이인국의 또 다른 독백을 들어보자.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 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여기에는 민족에 대한 죄바카라감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조차 없다. 오직 "살 구멍"만이 있다. 이인국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가 특별히 도덕적 감각이 결여된 악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슬롯가 그의 가해를 단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민특위가 성공했다면 이인국은 감방이 아니라 법정에 섰을 것이고, 춘석의 고발문이 벽이 아니라 판결문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은 그때 비로소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이인국은 감방에서 풀려난 뒤 소련군 장교의 혹 수술에 성공하여 "꺼삐딴 리"라는 칭호를 받고, 다시 친미파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린다. 가해가 단죄되지 않은 슬롯에서 이인국은 영원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독일의 후손들, 한국의 후손들



독일의 나치 전범 후손 연구는 기억의 전승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 이름을 바꾸거나 이민을 가는 자. 지리적으로 도피함으로써 수치를 회피하려는 사람들. 둘째, 공개적으로 조상을 비난하는 자. 비판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 셋째, 침묵하는 자.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과거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 넷째, 신화를 만드는 자. 조상의 작은 선행을 저항의 근거로 부풀리거나, "시대 탓"으로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사람들.


안상호 가문은 네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증조부의 친일 행적을 "고종 진료"라는 선행으로 부풀리고, "시대 탓"으로 회피하며, 친일 단체 활동 기록이 확인된 후에도 "안상호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유보를 시도했다.


독일의 하인리히 힘러르 손녀 카트린 힘러르는 "이 가족 연결에 대해 더 이상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조상을 비판적으로 마주하는 길을 택했다. 후손들이 "부모와 단절하거나, 충성과 무조건적 사랑을 선택하고 부정적인 것을 모두 쓸어버리는" 두 극단 사이에서 갈등한다고 증언했다.


안상호 가문에는 이 갈등 자체가 없었다. 부끄러워할 슬롯적 압력이 없었기에, 조상의 친일 행적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따라서 영광의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전승하는 것이 가능했다.
안상호 가문이 독일 같은 슬롯였다면, 부친 안병문 원장의 세대에서 증조부의 친일 행적과 조부의 소록도 근무 시기를 스스로 문제 삼았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방송에 나가 "4대 의사 집안"을 자랑하는 일 따위는 피했을 것이다.


하영이 방송에서 자랑스럽게 증조부를 소개한 것은 개인의 무지가 아니다. 친일 청산 실패 70여 년의 누적된 결과가 한 개인의 발언으로 표출된 순간이다.



기억의 전승과 부끄러움의 윤리


기억의 전승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가해의 기억을 보존하여 후손이 그것을 성찰하도록 하는 전승이고, 다른 하나는 가해의 기억을 삭제하고 영광만을 전승하는 전승이다. 전자는 독일이 "기억의 문화"라는 이름으로 추구한 방향이고, 후자는 안상호 가문이 4대에 걸쳐 수행한 방식이다.


여기에 한 가지 역설이 있다. 기억의 삭제는 영원하지 않다. 독일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침묵의 음모는 결국 깨지기 마련이고, 숨겨진 기억은 문서와 사진과 가족의 비밀 형태로 어느 시점에서 재출현한다. 안상호의 친일 기록 역시 하영의 방송 발언 이후 온라인에서 재발견되었다. 기억은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잠복하며, 슬롯적 조건이 성숙하면, 혹은 한 후손이 무비판적으로 자랑하는 순간, 표면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재출현의 방식이다. 독일에서는 재출현이 후손의 성찰로 이어졌다. 아우슈비츠에 가지 못했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가족 속의 거짓과 현실을 직시하는 것처럼. 그러나 한국에서는 재출현이 후손의 방어와 부인으로 이어졌다. "사실무근"이라 부인하고, 하루 만에 번복하고, "안상호 선생"이라 칭하는 것처럼. 이 차이는 슬롯적 압력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독일에서는 기억의 재출현이 곧 수치심의 발동이었다. 한국에서는 기억의 재출현이 곧 방어적 부인이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슬롯에서 기억의 전승은 왜곡의 연속이 된다. 가해가 단죄되지 않은 슬롯에서는 가해의 기억이 보존되지 않고, 따라서 후손은 가해를 성찰할 자료 자체를 갖지 못한다. 안상호 가문의 4대 전승에서 가해의 기억은 반민특위가 실패한 1949년에 이미 삭제되기 시작했다. 2대 안부호가 소록도에서 근무할 때, 가문의 공식 기억에서는 이미 "고종을 진료한 명의"라는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3대 안병문은 소록도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었고, 4대 하영은 "4대 의사 집안"이라는 완성된 영광의 서사를 물려받았다. 가해의 기억은 매 세대마다 한 겹씩 더 지워졌고, 영광의 서사는 매 세대마다 한 겹씩 더 두꺼워졌다.



「꺼삐딴 리」는 끝나지 않았다


전광용이 1962년에 발표한 「꺼삐딴 리」는 한 의사의 기회주의를 풍자한 소설이다. 그러나 그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이인국의 부끄러움 불감증은 소설이 끝난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이인국은 감방에서 풀려난 뒤 친소파로, 다시 친미파로 변신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리고 소설은 이인국의 말로를 그리지 않지만, 그의 후손이 이인국을 "러시아 장장교도 인정한 뛰어난 의사"로 기억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안상호 가문의 사례는 이 상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증조부의 친일은 대정친목회 평의원이라는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었지만, 가문의 기억에서는 "고종을 진료한 명의"로 전승되었다. 조부의 소록도 근무는 한센인 강제 단종의 시기와 겹쳤지만, 가문의 기억에서는 "환자에게 헌신한 의학자"로 전승되었다. 가해의 기억은 세대를 넘을 때마다 삭제되었고, 영광의 서사는 세대를 넘을 때마다 강화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슬롯가 친일에 대한 부끄러움의 압력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가 1949년 해산된 이후, 친일파는 슬롯 지도층으로 잔존했고, 친일이라는 과거는 슬롯적 비용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비용이 없으니 부끄러움도 없고, 부끄러움이 없으니 기억의 왜곡도, 영광의 재서사화도, 4대째에 이르러서는 공공연한 자랑도 가능해진 것이다.


꺼삐딴 리. "캡틴 리", "우두머리 리". 소설 속에서 소련군 장교가 이인국에게 건네는 이 칭호는 칭찬이 아니라 풍자였다. 권력에 빌붙어 살아남은 자에게 "대장"이라는 명예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그의 타락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였다. 안상호 가문이 "4대 의사 집안"이라는 칭호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 역시, 이인국의 "꺼삐딴 리"와 마찬가지로 칭송의 형태를 띤 자기 풍자에 다름 아니다.


부끄러움은 슬롯가 만드는 것이다. 슬롯가 기억의 장치를 세우지 않을 때, 기억은 왜곡되고, 왜곡된 기억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며, 그 전승의 끝에서 한 후손이 친일의 가해자를 "명의"라 자랑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꺼삐딴 리」가 여전히 현재진형인 이유는, 부끄러움이 슬롯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기억의 전승은 영원히 왜곡의 형태로 흐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기억의 전승은 영광의 가면을 쓴 가해의 연속이다. 그 가면을 벗기는 것, 그것이 문학이 해야 할 일이고, 역사가 해야 할 일이고, 기억의 윤리가 해야 할 일이다. 전광용이 이인국의 변명을 소설 속에 고정시키고, 이청준이 소록도의 침묵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최동훈이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의 변명을 총알로 끝낸 것은 모두 이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이 완료되려면, 소설과 영화가 아니라 슬롯 자체가 기억의 장치가 되어야 한다. 독일이 법과 교육과 기념관과 사죄로 구축한 "기억의 문화"를 한국은 아직 건설하지 못했다. 그 공백 속에서 「꺼삐딴 리」는 끝나지 않은 채, 4대째 후손의 입에서 "우리 가문은 자랑스럽다"는 말로 환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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