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트로이 전쟁은 끝났지만, 오디세우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가 맞서야 했던 가장 거대한 바다는 포세이돈의 바다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기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원작이 지닌 비선형적 구조는 놀란의 영화 언어와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진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조금씩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익숙하면서도 강력하다. 세 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해체되고 재조합된다. 관객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파편화된 기억을 함께 맞추어 나간다.
트로이 전쟁은 역사 속에서 '전략적 승리'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놀란은 승리의 영광 뒤에 숨겨진 참혹함을 직시한다. 불타버린 도시, 사라진 생명, 희생 위에 살아남았기에 평생 참회해야 하는 사람들.
전쟁은 이겼지만,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오디세우스가 10년 동안 바다를 떠돌아야 했던 이유는 신들의 저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보다, 자신이 만들어낸 비극과 기억의 시간을 건너는 길이 더 멀었는지도 모른다. 귀향은 단순히 특정 장소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저지른 행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와 깊게 연결된다.
트로이 목마라는 '완벽한 전략'을 통해 승리를 끌어낸 오디세우스는, 핵무기를 개발한 뒤 윤리적 자각과 죄바카라감에 갇혔던 오펜하이머와 닮아있다. 놀란의 세계에서 구원은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과거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무게를 안은 채 살아가는 데 있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제우스의 법'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
평화로운 시대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리는 이 말이,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전쟁터 위에 올려지는 순간 잔혹한 질문으로 변한다. 타인을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 법과 인간을 파괴해야 하는 전쟁의 당위성. 영화는 승리의 환호 대신 이 균열과 질문을 끝까지 붙든다.
인간은 지혜와 전략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그 결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오디세우스 역시 망각의 열매를 통해 괴로운 기억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굳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찾아낸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놀란이 던지는 '제우스의 법'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윤리적 중압감과 비극 속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존재는 영웅도, 신도 아닌 한 마리의 늙은 개, 아르고스였다.
스무 해의 세월이 흘렀다. 거지로 변장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함께 싸웠던 동료도, 가까운 가족도 변해버린 그의 겉모습만을 보았다. 사람은 의심하고, 계산하고, 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고스는 달랐다. 쓰레기 더미 곁에 누워 늙고 병들어 몸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던 개는 오디세우스를 단 한 번에 알아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손을 핥은 뒤,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눈을 감는다.
아르고스에게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왕도,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었다.
아르고스는 스무 해를 그저 견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주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아니라, 기억을 놓지 않는 일이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법이 말하는 거창한 정의보다 더 깊은 의미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누군가를 끝까지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아니 존재를 가장 존엄하게 만드는 일이다.
결국 오디세우스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뛰어난 항해술도, 제우스의 자비도, 승리의 기쁨도 아니었다.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해를 버틴 아내 페넬로페, 아버지를 기다린 텔레마코스, 그리고 한 생애를 바쳐 그를 알아본 아르고스.
집이란 단순히 돌아갈 공간이 아니라, 나를 알아보고 돌아와도 된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있는 곳이다.
영화관을 나오며 생각한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오디세이를 지나고 있다. 무언가를 잃고, 무언가를 후회하며, 그럼에도 삶이라는 바다를 건너 돌아갈 곳을 찾는다.
전쟁은 도시를 무너뜨리지만, 기억은 인간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무너진 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 역시 누군가의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그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거대한 영광이 아니라, 아르고스처럼 나를 끝까지 알아봐 주는 따뜻한 기억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