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귀함을 너무 자주 겉에서 찾는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몸으로 늙어가는지, 실패한 이력이 얼마나 되는지. 사람의 생을 펼쳐 읽기도 전에 먼저 표지를 보고 값을 매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쉽게 말한다.
천하다고.
나는 그 말이 오래 불편했다.
천하다는 말은 대개 아래를 향해 던져진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몸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에게, 실패한 사람에게, 세상이 보기 좋은 방식으로 늙지 못한 사람에게. 그 말은 마치 평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리 두기에 가깝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안도. 나는 저기까지 떨어지지 않았다는 자기 위안. 누군가를 낮은 자리에 세워두고서야 겨우 자신의 높이를 확인하는 마음.
그렇다면 묻고 싶어진다.
정말 천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일까.
아니면 그 삶을 내려다보며 안도하는 시선일까.
불법과 합법의 문제도 그렇다.
불법은 분명 잘못이다. 그러나 합법이라고 해서 언제나 품위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은 최소한의 경계일 뿐, 인간의 품격까지 보증하지는 않는다. 대놓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있지만, 법과 제도의 빈틈을 정확히 알고 그 안에서 더 교묘하게 사람을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약서에 적혀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절차상 문제없으니 바카라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상대가 무너진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어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 장면이나 글을 볼 때면 나는 오히려 더 서늘하다 못해 잔인하게 느껴진다.
불법은 적어도 자신의 얼굴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합법은 너무 말끔해서, 폭력의 손에 장갑을 끼운 것처럼 보인다. 피를 묻히지 않고도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방식. 바카라임을 지지 않기 위해 지식을 쓰고, 양심을 피하기 위해 제도를 이용하는 방식. 그것은 세련되어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귀하지 않다.
나는 천함이 직업에 붙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함은 실패에 붙지 않고, 가난에 붙지 않고, 몸의 낡음이나 상처에 붙지 않는다.
오히려 천함은 아주 멀쩡한 말투와 번듯한 옷차림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통찰처럼 전시하는 사람에게서. 상처 입은 사람을 관찰 대상으로 삼고, 그 사람의 무너진 계절을 미학적으로 판정하는 사람에게서. 인간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결국 인간을 깎아내리는 사람에게서.
어떤 사람은 상처 입은 이를 보고 '앙상하다'라고 말한다. '열매를 다 빼앗긴 나무 같다'라고 말한다. (SNS에서 자칭 정신과 의사라는 분이 화류계 종사자에 대한 소회라면서 쓴 글에서 봄)
생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존재처럼 묘사한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자꾸 걸린다.
나무가 앙상해 보이는 것은 겨울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지, 생이 끝났기 때문은 아니다. 잎을 잃은 나무에게도 뿌리는 있다. 가지 끝이 말라 보여도 안쪽에서는 아직 물이 도는 경우가 있다. 겨울의 나무를 보고 실패한 나무라고 부르는 사람은 봄을 기다려본 적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는 무너진 자리에서도 밥을 짓는다. 누군가는 손가락질받는 자리에서도 자식을 먹인다. 누군가는 세상이 천하다고 부르는 삶 안에서 누군가의 생을 붙들어준다. 밤새 일하고 돌아와 아이의 학원비를 마련하는 사람. 자기 몸 하나 편히 눕힐 틈 없이 가족의 내일을 버티는 사람. 망가진 뒤에도 다시 일어나 누군가를 품어내는 사람.
세상의 기준으로는 초라할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남은 이들에게 그는 결코 천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집이었고, 밥이었고, 마지막 끈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신보다 가까운 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귀함과 천함의 기준을 다시 묻고 싶다.
귀함이란 정말 흠 없는 삶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흠 많은 삶 속에서도 끝내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나오는가.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믿는다.
귀한 사람은 반드시 깨끗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귀한 사람은 대단한 지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귀한 사람은 타인의 가장 남루한 순간 앞에서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오늘만 보고 생 전체를 판정하지 않는 사람. 무너진 모습을 보고도 그 안에 남아 있는 뿌리를 보려는 사람. 자신이 가진 지식과 언어를 칼처럼 쓰지 않고, 가능하면 담요처럼 덮어주려는 사람.
반대로 천한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천한 사람은 누군가를 낮은 곳에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깨끗함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얼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상처를 보고 연민보다 우월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아무리 세련되어도 천하다.
그런 사람의 문장은 아무리 똑똑해도 가난하다.
인간을 잃어버린 지성은 결국 차가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만 어떤 판단은 바카라임을 묻기 위한 것이고, 어떤 판단은 존재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다. 전자는 필요할 수 있지만, 후자는 위험하다. 누군가의 잘못을 비판하는 일과 누군가의 존재를 천하다고 낙인찍는 일은 전혀 다르다.
사람은 잘못할 수 있다. 실패할 수 있다.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한 인간의 전부를 단번에 폐기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오래도록 그런 시선을 경계하며 살고 싶다.
누군가의 겨울을 보고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그 가지 끝에 다시 물이 오를 가능성을 떠올리는 사람이고 싶다. 상처 입은 사람을 소비된 열매처럼 묘사하는 사람보다, 그가 어떤 계절들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 먼저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다.
어쩌면 인간의 귀함은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누군가를 인간으로 바라보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함이란,
낮은 곳에 있는 삶의 이름이 아니라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자기 높이를 확인하려는 마음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진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다가 중 대사가 마음에 들어 화면을 찍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