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인가, 싶었다.

늦게 도착한 색-10화

by기백

호구인가, 싶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 사고 현장에서 가해자를 위로하고 돈을 쥐어주는 사람. 처음엔 살짝 헛웃음 나왔다, 호구인가.


그는 길을 건너다가 불법 유턴하는 택배 차에 받혔다.

교통사고다. 피해자다. 병원에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의 사고는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성수동 베이글이랑, 소금빵, 오복떡집 앙버터 모나카를 사러 가다가 났다. 그 빵과 떡을 사서 내게 오려던 길... (나의 시간은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다)

집이랑 가까운 빵집, 떡집이라서 걸어서 사가지고 오는 길에 택배차에 부딪혔다고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으니 검사차 병원에 가보겠다고 걱정 말라며 담담하게 전화를 했다. (결국 무릎이 크게 다쳐 수술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수술을 앞두고 있다ㅜㅜ)

난 사고 자체도 충격이고, 수술하는 좋지 않은 상황이 나로 인한 것만 같아 무거웠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사고 상황을 말해 줬을 때. 그때,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많은 글을 읽고 쓰면서 수많은 문장을 마주해 왔지만, 오빠의 사고 현장 이야기는 충격적인 울림? 그 이상이었다. 이해를 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사고 상황이면 보통은 그런 순간에 놀라고, 자신의 안위를 살피고, 더 길게는 보상범위를 생각하는 쪽, 즉 자신의 쪽으로 생각이 모이게 되는데, 그는 가해자에게 “아이나 노인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며 "휴일에 일하시다가 이런 일이 생겨서 당황했겠다, 다음부터 조심하시라"라고 말했다고 했다. 오히려 가해자분 손에 자신이 갖고 있는 현금을 쥐어쥐면서 "저는 기사님이 들어놓은 보험으로 치료받으면 된다고, 크게 다친 건 아닌 거 같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니...

그 장면이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처음엔 이 사람은 착하기만 한 호구인가? 낯설었다. 나는 계산해 보려는 쪽에 가까웠고,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다가 내가 모르는 더 넓은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 태도의 의도와 방향.

그건 착해서 손해 보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의 선택이라는 걸. 순간에 흔들린 게 아니라 순간을 넘어선 기준으로 움직인 사람. 그래서 그 장면은 사고로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드러내는 한 장면으로 남는다.

타인의 실수 앞에서 자신의 몫을 줄이는 대신 상대의 무게를 먼저 덜어주는 방식. 그 넓이는 말로 설명하기보다 이런 순간에만 보이는 것 같다. 자신이 처한 극한의 상황, 혹은 피해를 입어서 분노를 내도 될 상황에서도 평소 그가 가진 성품 그 이상. 물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경제적으로 감당 가능하니까 보일 수 있는 태도일 수도 있다. 현금을 쥐어준 것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가해자분 사정까지 살피고, 그 상황이 더 큰 사고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관점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일을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 날로 기억한다. 그의 그릇이 너무 커서 내가 담을 준비가 되었냐고 반문한 날.


세상이 당신의 선함을 나누는 건 괜찮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팬이 아니기에 당신의 건강만큼은 누구와도 코딱지만큼도 나눌 수 없고 협상하지 않겠다는 걸 기억해 달라고 말한 날이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자기 몸보다 먼저. 근처에 아이가 없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 가해자의 상황까지도 헤아리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말로 하는 선함이 아니라, 사고 현장에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선함. 아프면서도 상대를 먼저 살피는 온도.


그 사람은 내게 색을 선물한 사람이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깊고 선한 사람 곁에 오래 있으면,

그 온도가 옮겨오는 것처럼.

색이 번지는 것처럼.


결국, 그의 수술일정을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기도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낫게 할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다. 무력함을 인정하고 신께 구걸하고 있다.

내가 신과 거래할 게 없다. 내가 의를 행한다고 나의 소원과 교환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내 의는 내 인생에나 유익할 뿐이라는 것도 잘 안다. 신은 이렇게 납작 엎드려 구하는 인간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