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따라, 상설 전시에 따라 추천하는 미술관.
‘대한민국 미술관 여행’을 기획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 2024년 가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수년 동안 드라마와 시나리오를 썼지만 제작되지 못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게 장편 소설이었고, 때는 장편 소설 퇴고를 끝낸 시점이었다. 드라마에서 소설까지 긴 이야기를 써내느라 너무 오랜 시간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까닭에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마른 장작에 휘발유를 뿌린 것처럼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창작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던 내게 막연히 돌아다니는 건 의미가 없었고 일을 빙자한 외출이 절실했다. 장기간 밖으로 떠돌 수 있는 어떤 기획 같은 것이. 그렇게 탄생한 게 대한민국 미술관 여행이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에 있는 미술관을 다니면서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오가는 길에 만나는 자연의 변화와 공기의 질감은 (일의 성과와 상관없이) 산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경이로움을 새삼 깨닫게 했고, 미술관에 전시 중인 수많은 작품은 내게 저마다의 사연을 앞다퉈 꺼내놓았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가슴에 품었다가 나만의 언어로 변환시켰다.
당시 오마이뉴스에 미술관 여행을 연재했었는데, 반응도 뜨거웠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미술관을 다녀왔다는 이야기, 좋은 곳을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들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미술관을 취재 중 갑자기 계엄이 터졌다. 이후 하루가 멀다고 숨 막히는 사건 사고들이 벌어졌다. 당시 나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 한가한 미술 이야기가 가당키나 하는가? 싶어 위축되었다. 신문사에 연재를 약속했던 터라 글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혼란한 세상과 동떨어진 채 미술관 투어를 다니는 게 스스로 개념 없이 느껴져서 괴로웠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은 굴려 가야 하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나는 이 한 자락에 기대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이 작품으로 나는 2025년 상반기 오마이뉴스 게릴라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다. 돌아보면 우여곡절이 참 많았던 시간이었다.
나의 첫 바카라도 ‘다락방 미술관’이라는 그림 이야기였다. 이후 에세이, 클래식, 소설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썼고 7년 만에 다시 미술 이야기로 돌아왔다. 미술이나 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처음 달아 준 주제인 미술,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장르, 숨고 싶을 때나 위로가 필요할 때, 아이디어가 필요하거나 심심할 때 그림은 나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대한민국 미술관 여행을 쓰면서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우리나라 미술관 중 어디가 가장 좋으냐는 질문이다. 그럴 땐 옛날 유행어였던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데,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미술관이 다르고, 전시에 따라 인상 깊은 미술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시는 떼어놓고 여행 삼아 갈 수 있는 미술관만 보자면 봄엔 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호암 미술관, 여름엔 산 중턱에 계곡을 끼고 있어 청량한 물소리가 더위를 잊게 하는 춘천 이상원 미술관, 가을엔 단풍이 미쳐버린 산 뮤지엄과 석파정, 겨울엔 비교적 따듯하고 주변 일대가 미술관으로 둘러싸인 제주도 현대 미술관이 떠오른다.
또 상설 전시가 압도적인, 그래서 아무 때나 가도 실망하지 않는 곳은 리움 미술관과 양평 구하우스 미술관이다. 또 이번엔 기사로 쓰지 못했지만 강화도 해든 미술관과 폐교된 초등학교를 미술관으로 꾸민 당진의 아미 미술관도 내 최애 미술관 중 하나다. 지방의 작은 미술관들을 더 많이 소개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요즘은 명화들, 이를테면 고흐나 피카소, 르네 마그리트와 같은 작가들의 전시도 카메라 플래시만 터트리지 않으면 사진을 찍게 하는 분위기다. 사진 좀 찍는다고 작품이 훼손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난히 고압적으로 사진을 허용하지 않는 미술관들이 있었는데, 심지어는 작품이 아니라 미술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못 찍게 하는 일도 있었다.
소심한 편이라 따지지는 못했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느껴졌다. 관람자는 고려하지 않고 단지 미술관 편의에 맞춰진 규칙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훼손하지 않는 차원에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이 바카라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여행의 처음과 끝을 사랑하는 나의 부친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부친은 2025년 늦은 가을에 이번 생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의 앞에 이 바카라을 놓아드리고 싶다.
미술적 인간 프롤로그.
문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