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디쯤에 걷고있나

by구기리

이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가 나에게 있는 것인지, 나의 기준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인지.

현우는 버스 창에 이마를 기댔다. 가로등이 하나씩 창밖으로 지나갔고, 오늘로 스물두 번째 소개팅이었다. 그 숫자를 세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았고, 계속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 사람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오늘도 아니었다.


지난달에 만난 사람은 달랐다. 말이 잘 통했고, 좋아하는 것이 겹쳤고, 주말을 보내는 방식이 비슷해서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면 그림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같은 방향으로 걷고, 저녁이면 각자 바카라을 읽는 그런 풍경이었는데, 현우는 그 그림이 나쁘지 않다고, 아니 좋다고 느꼈다. 다만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입 밖에 내기 부끄러운 이유였지만 사실이었다. 성격은 더할 나위 없는데 외모가 취향이 아니라는 것, 정확히는 못생겼다고 느껴진다는 것이 스스로도 불편했다. 못생겼다는 말은 잔인했으나 마음이 가지 않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현우는 그 사이에서 오래 망설이다 결국 연락을 끊었다.


이번 달에 만난 사람은 외모가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대신 성격이 까탈스러웠다. 식당을 고를 때도, 자리를 잡을 때도, 음료를 시킬 때도 사소한 기준이 많았고, 함께 사는 미래를 떠올리자 벌써 피로해졌다. 집에 오는 길에 현우는 그것이 자신의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만나고 한 사람의 평생을 재단한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자신이 까탈스러운 사람이라서 비슷한 기질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았다. 아니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소년이 어른이 되려면 옥수수밭을 한 번 걸어서 통과해야 했다. 규칙은 하나, 걸어가는 동안 가장 크고 좋은 옥수수를 단 하나만 꺾어 오는 것이었다. 한 번만 꺾을 수 있었고, 뒤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소년은 밭에 들어섰고, 처음에는 작은 것들뿐이어서 지나쳤다. 중간쯤에 꽤 큰 것들이 보였지만 아직 끝까지 가 보지 않았으니 더 큰 것이 있을 것 같아 또 지나쳤다. 그러다 밭의 끝에 닿았을 때, 소년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물두 번이라는 숫자가 곧 옥수수밭이었다. 이것보다 나은 것이 나올 것 같아서 계속 앞으로만 걸었고, 그렇게 전부 지나쳐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옥수수가 아니라 걷는 사람이었다.


사랑은 희생이라고들 했다. 현우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쪽만 희생하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착취이고, 한쪽만 주는 관계는 아름답기 전에 소진될 뿐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공생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주는 일이 손해가 아니라 기쁨이 되는 관계라고 믿었다. 그러나 공생에 도달하려면 먼저 시작해야 했고, 시작하려면 선택해야 했고, 선택하려면 손을 내밀어야 했다. 스물두 번 동안 현우는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상대를 먼저 판가름했고, 조건이 맞는지 따진 뒤에야 좋아할지 말지를 정하려 했으며, 그래서 사랑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감정선 앞에서 번번이 멈췄다. 아니면 불붙듯 빠르게 타올랐다가 그만큼 빠르게 식었다, 인스턴트처럼.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온기에 잠깐씩 기대면서. 공생을 원한다면서 공생을 시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현우의 모순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섰고, 현우는 내려 골목을 걸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소년이 틀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욕심이었을까, 기준이었을까, 아니면 더 좋은 것을 놓칠까 봐 지금의 것을 잡지 못하는 두려움이었을까. 걷다 말고 현우는 걸음을 멈췄다. 기준이 높은 것이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기준 뒤에 숨는 것이 문제였다. 외모라서, 성격이라서, 취향이 아니라서, 그 말들은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이기도 했다. 시작하면 상처받을 수 있었고, 공생하려 했는데 혼자만 주게 될 수도 있었으며, 아끼려 했는데 아낌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이 두려워서 현우는 밭에 들어서기도 전에, 꺾기도 전에 옥수수의 크기부터 재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지난달에 연락을 끊은 사람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말이 잘 통하고, 미래가 그려지고, 곁에 있으면 편안했던 사람. 그 편안함이 얼마나 드문 것인지를 현우는 스물두 번을 겪고서야 알았다. 공생이란 완벽한 상대를 찾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함께 엮여 가는 일인지도 몰랐다. 상대의 얼굴이 취향이 아니어도, 까탈스러움이 가끔 피로해도, 그럼에도 곁에 있고 싶은 마음, 그것이 공생의 시작일지도.

아직 연락할 용기는 없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가, 내려놓은 것이 아까워 다시 집어 들었고, 그냥 쥐고 있었다. 옥수수밭은 끝이 없었다. 계속 걸으면 계속 밭일 뿐이어서,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지금 손 닿는 곳의 것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크지 않아도, 가장 완벽하지 않아도.

현우는 핸드폰을 쥔 채 오래 앉아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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