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시작되자마자 준호의 일상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바빠졌다고 말하기엔 정확하지 않았다. 일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소개가 갑자기 물밀듯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연락이었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자기 사람을 아껴 이름을 건네주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지 않았지만, 마음은 좀처럼 달가워지지 않았다. 지난 일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소개팅을 했고 그중 어느 것도 결실을 맺지 못했으며, 그 실패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쌓여 갔다. 그런데 정작 쌓인 것은 기대감이 아니라 실망감이었다. 그래서일까, 소개팅 연락이 와도 가슴이 뛰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약속을 잡는 일이 업무를 처리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 만남들을 돌이켜보면 준호는 언제나 조건을 먼저 보았다. 소비 습관, 안정적인 직업, 밝고 유쾌한 성격,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항목들은 소개팅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뚜렷해졌고, 그 목록이 선명해질수록 준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조건의 첫 번째 뿌리는 결핍이었다. 부유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금의 삶에도 그림자를 드리웠고, 상대를 바라볼 때도 똑같이 투영되었다. 두 번째 뿌리는 그 시절을 통과해 왔기에 생긴 소망이었는데, 힘든 순간에도 함께 웃으며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삶의 여정을 같이 버텨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 조건에 어느 정도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만나 보았다. 하지만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이유를 곰곰이 따져 보니 허탈할 만큼 단순했다. 조건이 흔들리면 그 조건이 만들어 주던 매력도 함께 사라졌고, 그것은 곧 처음부터 사람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조건을 좋아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번 소개에는 기대가 없었다. 늘 그렇듯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돌아올 생각이었고, 그것도 주선자의 성의를 생각해서, 딱 그만큼만이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후가 시작될 무렵 들어선 카페에서 나와 보니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준호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주황빛 하늘이 골목 끝까지 물들어 있었고, 마치 무언가를 대변하듯 그 풍경이 황홀했다. 이런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다섯 시간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다섯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시간 안에는 서로가 살아온 발자취가 있었고, 같은 시선으로 서로의 지나온 길을 함께 되돌아보는 동안 말이 끊기지 않았으며 침묵조차 불편하지 않았고 웃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준호는 걸으며 생각했다. 조건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고 그 목록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은 그것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고,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무언가가 거기 와 있었다. 조건보다 먼저 온 것, 조건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
설렘이었다.
오래전에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감각이 노을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업무처럼 나갔던 자리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리에서.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방금 나온 골목과 그 카페를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걸었는데, 오래간만에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