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날에

by조이


살다가 염세적인 마음이 올라올 때 나는 소설을 읽기로 했다. 인간이 다 똑같다든지, 인간관계 다 부질없다든지, 인생이 뭐 별거 있나 하는 생각들. 사실 평소에도 하는 생각들이지만 유난히 뾰족해지는 날들이 있다. 아니 오히려 납작해지는 건가. 아무튼 그래서 아무것도 마음에 담기지 않는 날들엔 소설을 읽기로 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거기서 거기.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거기서 거기. 그렇게 모든 인간군상이 평평해지는 날에 평평한 바카라 속에 납작하게 누워있는 소설 속 인물을 들여다본다. 염세적인 시각으로 보면 유명한 작가의 대단한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서 옮겨 붙는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끼리 얼마나 애틋하고 처연하고 처절한지, 그가 홀로 겪는 갈등과 고독은 또 얼마나 괴롭고 외로운지... 일개미든 여왕개미든 개미가 개미일 뿐이지, 지나는 발걸음에 짓밟히고 말 하찮은 미물로만 느껴지다가도, 가만히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그들의 행렬을 들여다보듯이 무심하게 바카라장을 넘긴다. 덮어버리면 그만일 바카라장을 다시 펼치는 이유는 나라도 그를 들어줘야 할 것만 같아서, 아니 사실은 그를 통해 나를 읽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쓴 바카라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에 감화되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바카라 보다 바카라을 쓴 사람이 귀하고, 소설 속 가상 인물보다 현실의 실제 인물이 중요한데. 머리, 가슴, 배 삼등분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개미들일지라도 그들의 세상에선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겠지. 내 곁을 지나고 있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도 사느라 애쓰고 있을 테고.


주홍글씨라는 명작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라고 내려치는 나 역시 그렇고 그런 인간이겠지만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가면은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지라고 생각했던 천진한 시절처럼 자꾸자꾸 걷게 되는 것, 평평하기만 한 나의 세상을 둥글게 둥글게 만들어주는 것. 그런 것이 내게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다시 걸어갈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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