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너뜨리는 일에만 성실했던 나에게

by지예

나는 본래 무척 게으른 사람이다. 아침잠이 많던 학창 시절, 하루의 시작은 늘 어슴푸레하고 흐릿했다. “제발 좀 부지런해져라”라는 엄마의 한숨 섞인 채근에 짓눌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 적도 있었다. 며칠 못 갈 줄 알면서도 형광등의 시린 불빛을 견디며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문제집을 펼쳤지만 그게 전부였다. 멍한 눈으로 연필을 돌리며 깨어 있는 척했다. 바카라상 앞에는 ‘착하고 성실한 딸’이라는 껍데기만 앉아 있었다. 속이 비어 있어도 겉만 그럴싸하면 어른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요령을 그때 배웠다.


슬롯에 나와서도 사람들은 나를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내게는 어려웠고, 그들이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을 부러워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 가진 물건, 월급의 차이까지 은근한 비교는 일상 곳곳에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그럴듯한 인정을 받고 싶었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남들보다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 뒤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노력과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는 그럴듯한 결과를 원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필요한 것을 배워 나가기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실패는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더 잘하기 위한 노력보다 아직 잘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는 데 힘을 쏟았다. 나를 무너뜨리는 일에 만큼은 누구보다 성실했다.


나를 돌아보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출산이었다. 아이의 해맑은 눈빛이 나를 향할 때면 겁이 났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믿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나를 온전히 신뢰하는 아이 앞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안의 불안과 괴로움이 곁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까지 전해질까 봐 마음을 고쳐 먹기도 했다.


그제야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차렸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힘겨워하면서도 정작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부족함을 없애야만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것과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부족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달라질 수 있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지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아이의 성적보다 정서 함량에 초점을 맞추는 육아인. 성향 다른 남매 사이에서 적절함을 찾는 양육인. 적당함과 게으름의 균형을 즐기는 지구인. 마음을 텍스트로 옮기는 발행인.

36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7화고립이라는 착각, 성찰이라는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