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der-Man: Brand New Day, 2026
모르겠다. 손이 만점으로 절로 갔다. 극장 개봉작 기준으론 19년도 이후로 처음이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2004)에서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위기에 처한 달리는 열차를 멈추고 시민들을 구한 뒤 마스크가 벗겨진 채로 기절하지만 열차 안 시민들은 그의 정체를 비밀로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스파이더맨은 피자 배달을 했고, 신문사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사투를 벌였으며, 숙모와 함께 우리들의 친절한 이웃이었고, 그 전에 그 역시 한 명의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젊은 청년이었고, 여느 이들처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었다. 열차 안의 다른 이들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지금이야 슈퍼히어로의 마스크 안 얼굴이 공개되면 나나 할 거 없이 핸드폰을 먼저 꺼내 들어서 찍는 통에 전 세계에 사진과 동영상이 퍼지며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이 삽시간의 문제일 테지만 말이다.
사실 ‘샘스파’도 그랬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도 그랬고, 얼마나 더 강력하고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외계생명체나 기계가 등장하는가 하는 건 더 이상 내겐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럴 때 많이 언급하는 것이 김혜수 주연의 <미옥>(2017)이다. 얼마나 더 잔인한 이미지를 전시할까 경쟁이라도 하는가 싶었던 그 시절의 영화는, 심지어는 칼이나 총, 도끼를 넘어 전기톱으로 상대에게 해를 입히기까지 했었다. 이미 세계관 최악의 적 타노스까지 등장한 마당에 더 이상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빌런을 찍어내는 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니의 <베놈> 시리즈는 그런 이유로 실패했다고 본다.)‘어스파’시리즈에서 남은 건 결국 피터 파커(앤드류 가필드)가 떨어지는 그웬(엠마 스톤)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상심에 빠지고 마는 장면뿐 아니었던가.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맞은 분기점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슈퍼 히어로물 전체에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마일스 모랄레스(샤메익 무어)가 다른 세계관의 다양한 캐릭터의 스파이더맨들을 만나며 시민으로서도 슈퍼히어로로서도 혼란했던 방향을 잡아가는 걸 보여주는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이후 세 명의 피터 파커가 한자리에 모이게 됐고, 세 번째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친절한 이웃으로 남는 대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그들에게서 떠나기로 했다. 흔히 <스파이더맨>을 떠올리면 거미줄을 발사하며 뉴욕의 빌딩들 사이를 활공하는 걸 떠올릴 텐데, 스콧 파커는 성장통을 겪고 있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어도, 스파이더맨은 웹 스윙 도중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데 이번 작에서 그는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의 오랜 친구 MJ(젠데이야)와 네드(제이콥 배덜런)는 대학에 진학했다. 진학했다가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있다. 한편, 피터는 누구의 발길도 들지 않을 법한 골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스파이더맨 수트를 착용한 후에나 슬롯로 나선다. 어린 나이에 그가 감당하기에 마음속 짐의 무게가 상당했을 것이다.
“난 피터 파커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이니까.”
<완다 비전>(2021) 시리즈에서도 잘 표현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낄 때면, 그 시간이 오래간 지속되다 보면 껍데기만 남고 안은 텅 빈 것이 된다. 관객들은 이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만들어 준, 아이언맨 자신의 것과 유사한 최첨단의 스파이더맨 수트를 봤지만, <브랜드 뉴 데이>에서 피터의 것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삼촌과 숙모를 잃었고, MJ 역시 잃을 뻔하자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요청해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골방에서 세탁기에 돌아가고 있는 스파이더맨 수트, 친구들과는 달리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극심한 고립감과 싸우고 있으며, 이미 세상살이에 많이 지친 듯한 모습을 보인다. 토니 스타크는 수트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수트를 가질 자격도 없다고 했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에서 그리고 나아가 MCU 전체를 관통해 온 고민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 두 갈래의 고민.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이전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윈터 솔져/버키 반즈(세바스챤 스탠)를 두둔한다. 그가 자유의지로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라, 세뇌당했기 때문이었다. 캡틴은 행위보다 그 사람의 의지를 더 중요시했다. 타노스가 우주가 자생하기 위해 전 인류의 절반을 무작위로 제거한 것과는 대조적인 부분이었다. <시빌 워>에서 정부가 슈퍼히어로를 관리, 감독하는 등록법에 반대했던 것도 히어로들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스파이더맨에게 우호적인 NYPD 진 드울프(리자 콜론 제야스)는 피터가 경찰의 무전을 도청하고, 도시 전역의 CCTV를 감시하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일삼지만, 도시를 위해 묵인한다.
타노스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손실을 본 도시였기에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도시 곳곳에 일으키는 사고들은 사소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브랜드 뉴 데이>에서 스파이더맨과 악당들이 거쳐 간 많은 장소는 매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언맨/토니 스타크로 대표되는 이들의 말도 이해가 간다. 그들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지구를 대표하게 된 이들이 감당해야 할 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을 보호하고 관리할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스템이 만능인 것도 아니다. 이전의 MCU 시리즈에서 나왔던 쉴드와는 다르게 <브랜드 뉴 데이>에서 등장한 ‘데미지 컨트롤’이다. 이전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에서도 허튼짓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하게 만들었던 곳인데, 정부 기관이다. 다시, 시스템이 만능인 것도 아니다.
피터 파커는 스티브 로저스의 의지를 계승했고, 스파이더맨은 아이언맨에게 새로운 슈트와 기술력을 받았고, 어벤져스에 합류하게 됐다. <파 프롬 홈>(2019)에서 피터 파커가 토니 스타크의 기술을 사용해 슈트를 만들 때 AC/DC의 <Back In Black>이 나왔는데, 이는 <아이언맨>(2008)의 등장을 장식했던 곡이었다. 스파이더맨은 MCU의 계승자로 새로 태어났었다. 이전 MCU 시리즈가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으로 대표되는 두 부류로 나눠 편하게 서사를 진행했던 건과 달리 그들의 부재 이후 홀로 그것을 감당하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의 아픔은 어느 정도일까. 나에겐 이번 작에서 성장통을 겪는 피터 파커를 지켜보는 일이 이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보다 큰일로, 영화 속 표현으로 “대왕 감자”로 느껴졌다.
너무나 큰 감자를 본 이들은 사실 “작은 감자”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대왕 감자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빈번하게 놓인다. 하지만 대왕 감자에만 몰두하다 보면 잠시 작은 감자로 치부된 소중한 이들에게 마음을 쓸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된다. 피터 파커는 스스로 작은 감자가 되어 살고 있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시민들은 저마다의 대왕 감자에 몰두하며 타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피터는 성장통을 겪으며 웹 스윙에 실패해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골목 구석에서 실수로 거미줄 폭탄을 터뜨리기도 하는데, 그 곁을 지나가는 누구 하나 피터에게 괜찮냐고 말을 거는 이가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감정이라곤 제거된, 설계된 대로 그곳을 지나가는 게임 속 NPC처럼 느껴진다. 스파이더맨이 우리의 친절한 이웃이라고 했는데, 사실 요즘은 이웃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된 시대다. 실제 옆집에 사는 이는 매우 작은 감자가 되고, 각자의 핸드폰 화면 속 인물과 더 가까워지고 그의 일정이 대왕 감자가 된 요즘의 삶이다.
계속해서 스파이더맨의 최측근으로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미셸 존스 왓슨, MJ의 삶 역시 드라마틱하다. 깨진 유리를 주먹에 꼭 쥐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맬컴과 마리>(2021)까지 갈 것도 없다.
이미 엄청난 경지의 것을 보여주는 젠데이야 역시 엄청난 연기로 극에 감정을 불어넣는다. 젠데이야가 등장한 모든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랑해. 너 없이 살아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
- 이해해.
이해한다니. 이러니까 뻑이가지.
스파이더맨이 아닌 스스로 작은 감자가 되기로 자처한 피터 파커의 일상엔 메이 숙모의 묘에 꽃다발을 두고 그간의 일상을 말하는 것뿐이다. 현실의 사람과 하는 소통은 일절 없다. 비단 영화 속 피터 파커의 모습만은 아닐 거로 생각한다. 진 드울프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피터에게 밖에서 사람들과 소통(“real human connection”)을 좀 하라고 하기에 이르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빌런 역을 맡은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다. (이번 작에선 헐크/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까지 등장하며 히어로보다 돌연변이(뮤턴트)라는 말이 많이 쓰이며 어쩐지 <엑스맨>쪽 떡밥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는데 후에 이에 대해 길게 얘기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진은 데미지 컨트롤에 의해 모종의 사건을 겪으며 자신에게 있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뿐인 언니를 잃었다. 유일하면서도 가장 큰 감자를 위해 사활을 건 진과, 가장 큰 감자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장 작은 감자가 되길 자처한 피터의 만남은 어쩐지 운명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모종의 이유로 다들 혼자가 된 것 같았으나 이내 모두 짝을 이룬다. 피터와 진 그레이, 피터와 진 드울프, 피터와 MJ, 피터와 프랭크(존 번달), MJ와 프랭크, 피터와 MJ와 네드 모든 이들이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렇다 해도 나한텐 아무도 없어.
- 내가 있잖아(you have me).
영화를 보는 동안 기억이 닿는 유치원 시절부터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의 수많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때론 내가 그들을 작은 감자 정도로 여기며 끊어내기도, 내가 끊어지기도 했지만 내 마음속에 가장 큰 감자였던 시기가 있던 이들의 이름들.
잠시 <브랜드 뉴 데이>와 관련 없는 <번지점프를 하다>(2000)의 대사를 빌려와 보겠다.
이 지구상의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실을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실이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너희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의 그 하고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너희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인연이라는 게 좀 징글징글하지?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난 것만으로도 대왕 감자였을 인연들, 이름들. 그걸 떠올리게 하는 영화로 <브랜드 뉴 데이>는 단지 의자에 앉아 이미지를 보는 것 이상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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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정말 많은 이름들을 떠올렸고, 당초 이 페이지를 그 이름들로만 채울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감자로도 생각지 않을 이들도 있겠다 싶어 생각을 고쳐먹었다.